무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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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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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선조 26) 윤11월 임진왜란 때 있었던 왕세자의 행영(行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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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93년(선조 26) 윤11월 임진왜란 때 있었던 왕세자의 행영(行營).
내용

본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분비변사(分備邊司)로 설치되었던 기관으로, 이해 12월공주에서 무군사로 개칭해 개설되었다. 무군사의 설치는 명군(明軍)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즉 1593년부터 일본과의 강화회담이 본격화되고 대부분의 명군이 조선에서 철수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경상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왜군과의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명나라는 일선에서 이루어져야 할 제반 조처를 왕세자를 중심으로 시행하도록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며 이를 미루어오다가 명나라의 강력한 요구에 못 이겨 결국 무군사가 설치되었다.

특히, 왕세자인 광해군은 몸이 몹시 불편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의 재촉을 받고 남하하였다. 광해군은 공주를 거쳐서 12월말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 병(兵)과 민(民)에 대한 책응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분비변사로 설치되었을 때는 왕세자를 중심으로 군사와 그에 관련된 재정 등을 관장하는 선에서 그 기능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군사는 군사는 물론 일선에서 행해지는 제반 행정을 모두 먼저 조처하고 뒤에 왕에게 보고하는 분조(分朝)로서 기능하였다.

1593년 12월 당시 무군사의 구성원은 좌의정 도체찰사 윤두수(尹斗壽), 좌찬성 정탁(鄭琢), 분호조판서 한준(韓準), 분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 좌윤 김우옹(金宇顒) 등이었다. 무군사에서 조처하는 제반 업무는 날마다 기록해 무군사일기(撫軍司日記)로서 왕에게 보고되었다. 무군사의 여러 임무 가운데 모병과 군사 훈련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한편, 왕세자가 명군과 접촉하면서 전주·공주·홍주 등지로 무군사를 옮겼다. 그래서 특히 경상도 일대의 군사 업무는 무군사가 크게 관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군사의 활동기록은 1594년 3월을 끝으로 나타나지 않아 이때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조선중기왜란기(朝鮮中期倭亂期)의 군령·군사지휘권연구(軍令·軍事指揮權硏究)」(차문섭, 『한국사학(韓國史學)』5, 1983)
「조선중기왜란기(朝鮮中期倭亂期)의 군령·군사지휘권연구(軍令·軍事指揮權硏究)」(차문섭, 『한국사학(韓國史學)』5,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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