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군사

  • 역사
  • 제도
  • 조선 후기
1593년(선조 26) 윤11월 임진왜란 때 있었던 왕세자의 행영(行營).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오종록 (고려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5년 06월 11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593년(선조 26) 윤11월 임진왜란 때 있었던 왕세자의 행영(行營).

내용

본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분비변사(分備邊司)로 설치되었던 기관으로, 이해 12월공주에서 무군사로 개칭해 개설되었다. 무군사의 설치는 명군(明軍)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즉 1593년부터 일본과의 강화회담이 본격화되고 대부분의 명군이 조선에서 철수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경상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왜군과의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명나라는 일선에서 이루어져야 할 제반 조처를 왕세자를 중심으로 시행하도록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며 이를 미루어오다가 명나라의 강력한 요구에 못 이겨 결국 무군사가 설치되었다.

특히, 왕세자인 광해군은 몸이 몹시 불편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의 재촉을 받고 남하하였다. 광해군은 공주를 거쳐서 12월말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 병(兵)과 민(民)에 대한 책응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분비변사로 설치되었을 때는 왕세자를 중심으로 군사와 그에 관련된 재정 등을 관장하는 선에서 그 기능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군사는 군사는 물론 일선에서 행해지는 제반 행정을 모두 먼저 조처하고 뒤에 왕에게 보고하는 분조(分朝)로서 기능하였다.

1593년 12월 당시 무군사의 구성원은 좌의정 도체찰사 윤두수(尹斗壽), 좌찬성 정탁(鄭琢), 분호조판서 한준(韓準), 분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 좌윤 김우옹(金宇顒) 등이었다. 무군사에서 조처하는 제반 업무는 날마다 기록해 무군사일기(撫軍司日記)로서 왕에게 보고되었다. 무군사의 여러 임무 가운데 모병과 군사 훈련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한편, 왕세자가 명군과 접촉하면서 전주 · 공주 · 홍주 등지로 무군사를 옮겼다. 그래서 특히 경상도 일대의 군사 업무는 무군사가 크게 관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군사의 활동기록은 1594년 3월을 끝으로 나타나지 않아 이때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조선중기왜란기(朝鮮中期倭亂期)의 군령·군사지휘권연구(軍令·軍事指揮權硏究)」(차문섭, 『한국사학(韓國史學)』5, 1983)

  • - 「조선중기왜란기(朝鮮中期倭亂期)의 군령·군사지휘권연구(軍令·軍事指揮權硏究)」(차문섭, 『한국사학(韓國史學)』5, 1983)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