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군삼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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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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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금군인 내금위(內禁衛) · 겸사복(兼司僕) · 우림위(羽林衛)를 합쳐서 부르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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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금군인 내금위(內禁衛) · 겸사복(兼司僕) · 우림위(羽林衛)를 합쳐서 부르던 칭호.
내용

원래 내금위·겸사복·우림위는 각각 15세기 초엽부터 말엽에 걸쳐 설치된 뒤 무예가 출중한 장번(長番)군사로 편성되어 각각 독자적인 지휘계통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들을 합쳐 내삼청(內三廳)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세력에 의해 호위청(扈衛廳)이 설치되어 이들이 새로 왕권 호위를 맡게 됨으로써 본래의 금군인 내삼청은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1652년(효종 3) 이후 북벌을 위해 군비를 확충하는 과정에서 분리 독립되어 있던 내삼청을 하나로 묶어 600여인의 군사를 좌·우별장(左右別將)이 통솔하는 체제를 갖추고 이어서 정원을 1,000인으로 늘렸으나 효종이 죽은 뒤 쇠퇴하였다.

금군삼청 또는 금군청이라는 명칭은 바로 이 쇠퇴한 내삼청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1664년(현종 5) 금군을 700인으로 정하고 7번으로 교대근무하도록 하는 한편, 이를 1인의 별장이 총지휘하게 하였는데, 그 뒤 대체로 이 체제가 유지되었으며, 금군삼청이라는 명칭도 이 때부터 사용되었다.

금군삼청이 1755년(영조 31)에는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되었으나, 그 조직이나 기능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임무는 국왕의 동가(動駕)·전좌(展座)를 시위하고 궁궐내 회랑과 도성 8문, 기타 요소에 입직(入直)하는 일 등이었다.

참고문헌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육군본부, 한국군사연구실, 1977)
『조선시대군제연구』(차문섭,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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