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예조좌랑, 형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01년 세자시강원문학에 등용되었고, 이듬해 응교 겸 교서관교리로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역대 실록의 재간행에 참여하였다. 정언 · 이조좌랑 · 사서 · 직강 등을 거쳐 1603년 사옹원정(司饔院正), 다음 해 응교 ·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 전한, 1607년 사성, 이듬해 직제학 ·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의 처남으로 일문이 요직에 나갔다. 예조참판 때 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 일파를 탄핵해 숙청하였다. 그 뒤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대북에 가담해 정권을 좌우하며, 대사간 · 도승지 및 이조 · 병조 · 형조의 참판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시인 권필(權韠)을 무고해 유배시켰고, 앞서 임해군(臨海君) · 영창대군(永昌大君) · 능창군(綾昌君) 등을 무고해 죽이는 데 가담한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 1등에 책봉되어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판서로서 이이첨 · 박승종(朴承宗) 등과 삼자동맹을 맺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위해 대북에 속한 언관 · 유생들을 동원, 폐모론을 일으켰다. 이 해 11월 다시 반대파를 물리치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관료 · 유생들을 투옥, 유배당하게 하는 등 횡포를 자행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을 당하였다.
이이첨 · 정인홍 등과 대북을 영도할 때는 외척 세력을 대표해 정권을 농단했고, 한 때는 이이첨 · 한찬남(韓纘男) 등과 권력을 다투면서 서로 반목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이이첨 · 정인홍보다는 한 등급 낮추어 죄가 다스려졌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조야집요(朝野輯要)』
- 『당의통략(黨議通略)』
- 『대동야승(大東野乘)』
주석
-
주1
: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 또는 그런 사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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