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운와(雲窩). 정국공신 민효증(閔孝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의(閔義)이고, 아버지는 민상(閔祥)이며, 어머니는 이예원(李禮元)의 딸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손녀사위다.
1584년(선조 17)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서 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성균관사예를 거쳐 1597년 동부승지·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그 뒤 병조참지·오위장을 지내며 주로 서반직에서 활동하였는데, 정인홍(鄭仁弘)이 적극 추천하여 예조참의·호조참판을 거쳐 1599년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때 정계는 북인이 집권하면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어 정쟁을 일삼으니, 민몽룡은 대북의 편에 서서 소북을 공격하였다.
소북의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사태가 역전되어 대북이 물러나면서, 역시 관작이 삭탈되었고, 그 이듬해 대북이 집권하여 다시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으로 갈리자, 육북에 가담, 이이첨(李爾瞻)과 뜻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소북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이 집권하면서 중용되어 경기관찰사·좌참찬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1618년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때 제기된 폐모론(廢母論)을 강력히 주장하여 대비의 호를 삭제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데 앞장섰다. 인조반정 후 관작이 추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