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우인(友仁), 호는 소요당(逍遙堂). 강사근(姜思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국흥(姜國興)이고, 아버지는 광양현감(光陽縣監) 강행(姜行)이며, 어머니는 문씨(文氏)이다.
독학으로 학문에 힘써 명망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매 훈도의 직임을 다하였다. 1469년(예종 1) 추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제수된 이후, 성균관으로 자리를 옮겨 후진양성에 힘썼다.
성종 때에는 학덕으로 이름이 높아지면서 주백손(朱伯孫) · 김극검(金克儉) · 정구년(鄭龜年) · 주계정(朱繼程) 등과 더불어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는 조정의 평가에 따라 서용(敍用)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하여 폭정이 계속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단성(丹城)의 별장으로 낙향하였다.
그리하여 산수간을 소요하면서 여생을 즐기는 한편 후진교육에 힘쓰니,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어득강(魚得江) · 김수경(金守敬) · 이적(李迪) 등은 모두 강문회의 문인이었다. 천성이 순후하고 준정(峻整: 엄숙하고 단정함)하였으며 심기를 바로 하고 행동에 가식이 없었다. 시문에 능하였는데, 특히 간고(簡古: 간결하고 예스러움)하여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저서로는 『소요당기(逍遙堂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