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權韠)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여장, 호는 석주이다. 선조 때 활동했던 시인으로, 목릉성세(穆陵盛世)로 일컬어졌던 당대 문단에서 이안눌과 함께 ‘이재’로 불렸다. 호방하고 매사 얽매이지 않는 성품을 지녔으며, 당나라 시대 시풍의 낭만적 서정과 당대 현실을 풍자한 사회성 높은 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저술로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이 현재 전해진다.
권필(權韠)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여장(汝章), 호(號)는 석주(石洲)이다. 승지 권기(權祺)의 손자이며, 습재(習齋) 권벽(權擘)과 경주 정씨 사이에서 난 다섯째 아들이다.
석주 권필은 정철(鄭澈)의 제자로, 성격이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野人)으로 일생을 마쳤다. 선조 때 시인으로 목릉성세(穆陵盛世)로 일컬어지는 당대 문단에서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이재(二才)’로 불렸다.
젊었을 때에 이안눌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찾아갔다. 19세에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장원(壯元)을 하였다. 그러나 글자 하나를 잘못 적은 일로 인해 내쫓김을 당하자,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권필의 부인이 그에게 금주를 권하자, 권필은 「관금독작(觀禁獨酌)」을 지었다.
권필은 동료 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 · 동몽교관(童蒙敎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강화에서 송희갑(宋希甲) 등 많은 유생(儒生)을 가르쳤다.
권필은 시를 짓는 재능이 뛰어났다. 이 때문에 그는 1601년(선조 34) 원접사(遠接使) 이정귀(李廷龜)의 추천을 받아, 1602년(선조 35)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埈) · 최정건(崔廷健)이 왔을 때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606년(선조 39)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이 중국 사신으로 왔을 때는 한강 접빈(接賓)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주전론(主戰論)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광해군 초에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이 권필에게 서로 가깝게 지내길 청했으나, 권필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임숙영(任叔英)이라는 인물이 과거 시험의 「책문(策文)」에서 전란 후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면서, 유희분(柳希奮) 등 권신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공격했다가, 광해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삭과(削科)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권필은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이를 풍자(諷刺)하고 비방하였다. 이 때문에 광해군이 크게 화를 내며 시의 출처를 찾았다. 그러던 중 1612년 김직재의 옥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권필이 조수륜과 연관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권필은 전라남도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귀양지로 가던 도중 동대문 밖에서 그를 동정하는 행인들에게 받은 술을 폭음(暴飮)했다가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호방하면서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성품으로, 중국 당나라 시풍의 낭만적인 서정과 당대 현실을 풍자한 사회성 높은 시를 많이 남겼다는 평을 듣는다.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이 현재 그의 저서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