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용 ()

죽창유고
죽창유고
유교
인물
조선 중기에, 김화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대수(大受)
죽창(竹窓), 저도(楮島)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9년(선조 2)
사망 연도
1601년(선조 34)
본관
능성(綾城)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김화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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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김화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대수(大受), 호는 죽창(竹窓)·저도(楮島).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내고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된 구사맹(具思孟)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 증영의정 신화국(申華國)의 딸이다. 사승관계(師承關係)는 미상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0년 생원시에 합격, 1598년 김화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권필(權韠)과 함께 상소하여 강경한 주전론을 펴, 주화(主和)하는 두 상신의 목을 벨 것을 주청했다. 현감으로 3년간 재직 중에는 백성을 구제하는 데 주력, 선정을 베풀어 치적을 올렸다.

그는 시재가 뛰어나 당시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권필·이안눌(李安訥) 등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으며 서로 창화(唱和)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가 지은 시 가운데는 시인으로서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한 감회·서경·애정을 주제로 한 것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의 고뇌와 갈등의 현실고발을 주제로 하는 비판·풍자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차천로(車天輅)는 그의 시에 대해 “봄바람에 움직이는 버들가지의 풍광과 같이 아름답고, 물 위에 피어나는 연꽃이 달그림자를 받음과 같이 청수하다”고 평하였다. 그가 33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권필은 그의 고고한 시재를 몹시 아쉬워하며 유고를 편집하고 서문을 붙였다. 저서로는 『죽창유고(竹窓遺稿)』 2책이 있다.

참고문헌

『죽창유고(竹窓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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