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대수(大受), 호는 죽창(竹窓)·저도(楮島).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내고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된 구사맹(具思孟)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 증영의정 신화국(申華國)의 딸이다. 사승관계(師承關係)는 미상이다.
1590년 생원시에 합격, 1598년 김화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권필(權韠)과 함께 상소하여 강경한 주전론을 펴, 주화(主和)하는 두 상신의 목을 벨 것을 주청했다. 현감으로 3년간 재직 중에는 백성을 구제하는 데 주력, 선정을 베풀어 치적을 올렸다.
그는 시재가 뛰어나 당시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권필·이안눌(李安訥) 등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으며 서로 창화(唱和)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가 지은 시 가운데는 시인으로서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한 감회·서경·애정을 주제로 한 것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의 고뇌와 갈등의 현실고발을 주제로 하는 비판·풍자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차천로(車天輅)는 그의 시에 대해 “봄바람에 움직이는 버들가지의 풍광과 같이 아름답고, 물 위에 피어나는 연꽃이 달그림자를 받음과 같이 청수하다”고 평하였다. 그가 33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권필은 그의 고고한 시재를 몹시 아쉬워하며 유고를 편집하고 서문을 붙였다. 저서로는 『죽창유고(竹窓遺稿)』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