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수(大手), 호는 습재(習齋). 권염(權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흥창수(廣興倉守) 권억(權憶), 아버지는 좌승지 권기(權祺),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목사 김세영(金世英)의 딸이다. 시인 권필(權韠)의 아버지이다.
1543년(중종 38) 주1에 합격하고 같은 해 주2의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발탁되었다. 이때 안명세(安名世) · 윤결(尹潔) 등 청류 선비들과 교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시 윤임(尹任) 등과 친하며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공박하면서 야기된 을사사화에 화를 입자 모든 교유를 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선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 ·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고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註官)이 되어 『중종실록』 ·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으로서 『명종실록』의 편찬에 주3
이문(吏文)에 밝아 행정 실무에 능했고,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일본 승사(僧使)를 접대하고, 이어 서장관(書狀官)과 동지사로 두번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원접사(遠接使)가 되기도 했다. 외직으로는 성주목사 · 장단부사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었다가 순무어사 허봉(許篈)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그 뒤 대호군 · 오위장 ·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폈다. 시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승문원부제조 · 제조(提調) 및 지제교(知製敎)를 오랫동안 지내며 문한(文翰)을 주관하였는데, 특히 명나라에 오가는 외교 문서를 전담했다.
1572년(선조 5) 김성일(金誠一) 등과 함께 완의록(完議錄)에 올랐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한시에 능해 많은 사람들이 권벽의 시를 즐겼으며, 당대의 명사인 노수신(盧守愼) · 정유길(鄭惟吉) 등도 시문을 높이 평가했다.
50여 년 벼슬 재위 기간 가사를 돌보지 않고 자식의 혼사도 모두 부인에게 맡겼으며, 손님도 거의 맞지 않으면서 오직 시에만 마음을 쏟아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주4 8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