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집』은 조선 중기 시인 권필(權韠)의 시문집이다. 11권 4책의 목판본으로 본집은 8권이다. 권필의 문인인 심기원과 오숙·택당 이식 등이 권필의 시문을 모으고 편집한 후, 1632년 봄에 전라도관찰사 심기원과 전주부윤 홍보가 전주에서 편집된 권필의 시문을 간행하였다. 이것이 『석주집』 초간본으로, 원집 8권과 외집 1권으로 구성되며, 이정귀와 장유의 서문, 심기원의 발문이 실려 있다.
11권 4책. 목판본. 본집은 8권으로 되어 있다.
권필(權韠)의 시문은 그의 문인인 심기원(沈器遠, ?1644)과 오숙(吳䎘, 15921634)이 1차로 다듬고 정리한 구본(舊本),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숙부 집에서 발견된 신본(新本),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초고[亂藁]로 존재해 왔다. 이식이 이들 시문을 모으고 추려서 편집한 후, 1631년(인조 9) 5월 전주부윤(全州府尹) 홍보(洪𩇉)에게 보냈다. 그리고 1632년 봄에 전라도관찰사 심기원과 전주부윤 홍보가 전주에서 이식이 편집한 권필의 시문을 간행하였다.
이것이 『석주집(石洲集)』 초간본으로, 원집 8권과 외집 1권이으로 구성된다. 이 초간본에는 이정귀(李廷龜)와 장유(張維)의 서문(序文), 심기원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현재 간송미술관, 성암고서박물관 등에서 이 초간본을 소장하고 있다. 이후 초간본의 원집은 몇 차례 보각(補刻)과 복각(覆刻)되었다. 그런데 심기원이 1644년 역모(逆謀)에 연루되어 죽었기 때문에, 보각과 복각의 과정에서 심기원의 발문이 빠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식이 홍보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었다.
이후 이동직(李東稷)이 별집 2권(시 100여 수, 문 9편)을 추가하고 송시열(宋時烈)에게 별집 발문을 받아, 1647년(현종 15) 4월에 『석주집』을 중간(重刊)하였다. 이 중간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 주요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권필의 현손(玄孫)인 권적(權𥛚)이 1742년(영조18)에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전주에서 『석주집』을 또 다시 중간하였다. 이 세 번째 간행본[三刊本]은 편집 순서와 구성이 중간본과 같으나, 심기원의 발문이 없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이 세 번째 간행본을 소장하고 있다.
권두(卷頭)]에 이정귀 · 홍보 · 장유의 서문이 있고, 별집 뒤에 송시열이 쓴 발문이 있다. 판본에 따라서는 권필의 아들 권항(權伉)의 『송암유고(松菴遺稿)』가 같이 실린 것도 있다. 원집과 별집에 시 836수, 문 25편이 수록되어 있다.
『석주집(石洲集)』은 권1부터 권8까지 시체별(詩體別)로 편차되어 있으며, 각 시의 창작 연대를 확정하기 어렵다. 권1은 오언 고시(五言古詩) 58수, 권2는 칠언 고시(七言古詩) 45수, 권3은 오언 율시(五言律詩) 131수, 권4는 칠언 율시(七言律詩) 87수, 권5는 오언 배율(五言排律) 8수, 권6은 오언 절구(五言絕句) 31수, 권7은 칠언 절구(七言絕句) 209수, 권8은 잡체시(雜體詩) 32수를 수록하였다. 외집에는 소(疏) 1편, 잡술 1편, 설(說) 2편, 제발(題跋) 2편, 기(記) 2편, 행장(行狀) 1편, 제문(祭文) 1편, 「주사장인전(酒肆丈人傳)」, 「곽삭전(郭索傳)」 등 전(傳) 2편, 명(銘) 4편, 잠(箴) 2편 등을 실었다. 또, 별집 권1은 각 체별로 모두 235수의 시를 실었고, 별집 권2는 서(書) 2편, 발(跋) 1편, 제문 2편, 서(序) 2편, 기 1편 「사우록(師友錄)」 1편 등을 실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손꼽히는 권필의 시 작품은 모두 836수 남아 있다. 이밖에 별집을 편찬(編纂)하면서, 풍자(諷刺)가 너무 심한 작품과 권필이 승려들과 주고받은 시 500수가 송시열에 의하여 삭제되어 전하지 않는다. 권필의 시문에는 다른 사람과 증답(贈答)한 작품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수창(酬唱)한 작품이 많다.
권필의 시는 허균(許筠)을 비롯하여 김만중(金萬重) · 양경우(梁慶遇) · 남용익(南龍翼) · 홍만종(洪萬宗) 등 조선의 여러 문인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남용익은 그의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역대의 뛰어난 시인 79명을 가려 뽑았는데, 그중에서도 고려조와 조선조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 각 세 사람씩을 꼽으면서 권필의 시가 ‘정경(情境)’의 어울림에서 가장 으뜸이 된다고 했다. 또 허균은 그의 시를 “절대미인이 화장도 하지 않고 구름도 가던 길을 멈출 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등불 아래에서 우조(羽調) · 계면조(界面調)를 부르다가 곡조(曲調)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일어나 가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평하여, 그의 시에 담긴 아름다움과 긴 여운(餘韻)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 밖에 문인들의 시평(時評)을 종합하여 보면, 권필은 천기(天機)의 묘한 이치를 갖춘 시인으로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아름다우면서도 부드러우며 정(情)의 표현에 뛰어나다. 그리고 한번 읽으면 마을을 울려 쉽게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권필은 각 시체(詩體)에 능하였으며, 특히 장편 고시(古詩)에 뛰어나 「천하창창취중주필(天何蒼蒼醉中走筆)」 등과 같은 작품은 구상의 웅대(雄大)함이나 표현의 절묘(絕妙)함이 다른 이가 능히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받았다.
권8에 실린 여러 형식의 잡체시는 그의 다양한 실험 정신(實驗精神)과 언어 구사의 탁월한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에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나라의 안위(安危)와 전쟁의 참화(慘禍)를 강개(慷慨)한 내용이 많고,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은 작품도 적지 않다.
그리고 외집에 실린 2편의 전 가운데 「곽삭전」은 게를 의인화(擬人化)한 한문 단편 가전체 소설(假傳體 小說)이고, 「주사장인전(酒肆丈人傳)」은 탁전(托傳)으로 그의 젊은 날의 강개와 학문적 태도를 잘 알 수 있는 작품이다. 권필은 박지계(朴知誡)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나, 사상적 성향은 성리학의 틀 속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맑고 산뜻하고 호방(豪放)한 시를 지어 성당(盛唐)의 격조(格調)를 얻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삼당시인(三唐詩人)과 함께 이른바 목릉 성세(穆陵盛世)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