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수지(遂之). 아버지는 군수 심간(沈諫)이다. 권필(權韠)의 문인이다.
유생으로 이귀(李貴) 등과 협력하여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에 특진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가 되어 난을 막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경기·충청·전라·경상도의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되어 종사관 이상급(李尙岌)·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세자를 모시고 피란하였다.
그 뒤 풍정연(豊呈宴)을 빨리 중지하고 분위사(奔慰使)를 보낼 것, 왕이 정전(正殿)에서 거처하는 것을 피할 것, 음악을 철폐할 것 등의 소를 올렸다. 1628년 강화부유수를 거쳐, 1634년 공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의 방어책임을 맡았고, 164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44년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였다. 이를 기회로 심복의 장사들을 호위대(扈衛隊)에 두고 전 지사(前知事) 이일원(李一元), 광주부윤(廣州府尹) 권억(權澺) 등과 모의하여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을 추대하려는 반란을 꾀하였다.
이 모의는 왕이 믿고 의지하는 무신이나 재상을 초청하여 술에 취하게 한 뒤 죽이고 거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하 황헌(黃瀗)·이원로(李元老)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具仁垕)에게 밀고하여 탄로되자, 거사 전에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