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계 ()

잠야집
잠야집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사서근사록의의』, 『주역건곤괘설』, 『잠야집』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인지(仁之)
잠야(潛冶)
시호
문목(文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3년(선조 6)
사망 연도
1635년(인조 13)
본관
함양(咸陽)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사헌부지평
정의
조선 후기에, 『사서근사록의의』, 『주역건곤괘설』, 『잠야집』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지(仁之), 호는 잠야(潛冶). 아버지는 군수 박응립(朴應立)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면서 『논어』를 탐독해 장차 대유(大儒)가 될 이상을 갖추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제천으로 피난했고, 정유재란 때는 괴산에 우거하면서 어머니의 병환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1606년(선조 39) 이조판서 허성(許筬)이 그를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천거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609년(광해군 1) 옥당(玉堂: 부제학 이하 부수찬 등 홍문관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원의 총칭)의 최현(崔晛)이 좌세마 겸 서연관(左洗馬兼書筵官)으로 천거했지만, 사양하였다.

그 뒤 정신(廷臣) 가운데 광해군의 생모에게 비호(妃號)를 올리자는 주장이 있자 호서(湖西)로 거처를 옮기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권흥(權興)·조익(趙翼) 등과 도학을 강론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왕의 부름으로 사헌부지평을 제수받았다. 박지계는 당시의 과거제도의 폐단을 논해, 주자(朱子)의 덕행과(德行科), 조광조(趙光祖)의 현량과(賢良科), 이이(李珥)의 선사법(選士法) 등이 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훌륭한 제도라고 진언하였다.

박지계는 예론에 관한 의견에서 조정의 중신들과 대립되자 잠시 남양(南陽)에 우거하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내려가 왕을 호종하였다.

수복 후 김장생(金長生)과 같이 서울로 돌아와서 양민치병(養民治兵)의 계책을 상소하였다. 또한 이이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수창(首唱: 두목이 되어 주창함)하기도 하였다. 이방숙(李芳淑)·조광선(趙光善)·김극형(金克亨)·권시(權諰)·원두추(元斗樞)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저서로는 『사서근사록의의(四書近思錄疑義)』·『주역건곤괘설(周易乾坤卦說)』 및 『잠야집(潛冶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충청남도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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