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여시(汝時), 호는 월봉(月峰). 홍세경(洪世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찬성 홍수(洪脩)이고, 아버지는 형조좌랑 홍난상(洪鸞祥)이며, 어머니는 구예연(具禮淵)의 딸이다. 권필(權韠)의 문인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금화사별좌(禁火司別坐)·한성부참군을 지내다 1615년 부친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광해군의 실정(失政)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면천으로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장원해 전적·수찬·장령 등을 역임하고 원주목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이인거(李仁居)·고찬(高瓚)·고계립(高繼立)·고대립(高大立) 등이 대북파의 유효립(柳孝立) 등과 은밀히 교통해 광해군의 복위를 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은 조정이 오랑캐와 화해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죄인들의 목을 베어야 한다면서 이인거를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거 등이 횡성 등지의 군기(軍器)를 탈취한다는 진극일(陳克一)의 보고를 받고, 그는 원주에서 이인거를 기습, 체포함으로써 난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부호군이 되고, 이어 소무공신(昭武功臣) 등에 녹훈되어 풍녕군(豊寧君)에 봉해졌다.
1632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1638년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도 다녀와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3공 6경(三公六卿)들은 모두 자제를 인질로 보내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를 어긴 탓에 탄핵을 받아 남이공(南以恭)과 함께 유배되기도 하였다.
벼슬은 좌참찬에까지 이르렀고,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도에 들어가 수릉관(守陵官)을 지냈다. 그리고 청나라에 들어가 군대징발 요청에 대한 나라 사정을 진술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월봉집』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경헌(景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