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으로 흐르는 위사하(葦沙河)를 따라 통화에서 집안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으며, 이 교통로를 북쪽과 남쪽에서 막아 쌓은 성벽이 있고, 동쪽에서 위사하로 합류하는 목선두구(木銑頭溝)를 막은 성벽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북쪽의 성벽을 두도관(頭道關)이라 하고, 남쪽의 것을 이도관마장(二道關馬墻)이라 부른다.
남북 길이 약 600m, 동서 너비는 70∼250m에 불과하며 험준한 산을 이용하여 물길을 막은 산성을 형성하고 있다. 성벽은 냇돌을 이용하여 크기가 30×50㎝ 정도로 대강 다듬어 성벽을 쌓고, 바깥쪽에는 참호(塹壕)를 만들었다.
두도관마장은 성벽의 잔존한 길이가 77.6m이고, 성벽의 기초너비 10.5m, 성벽의 높이 2.3m이다. 이 성벽의 바깥으로 1∼4.6m 되는 곳에 참호가 있다. 참호는 길이 53m, 너비 3.5m이며, 깊이는 0.8m인데, 깊이 40∼50㎝쯤까지 물이 고여 있고, 그 바깥으로도 가로로 둑을 쌓았다. 이 둑은 길이가 40m, 아래 너비 4.8m이며, 높이 1.45m이다.
남쪽의 이도관마장은 파괴가 가장 심하여 길이 69.6m, 너비 8m, 높이 2.1m의 성벽만 남아있다. 동쪽의 삼도관마장은 길이 125m, 너비 6.5∼6.9m, 높이 0.5∼0.7m의 성벽이 있고, 성벽의 중간부위에 너비 4m의 문구(門口)가 있다. 이 문터의 좌우에는 안팎으로 뻗은 벽에 너비 3m, 길이 9.6m가 되는 두 개의 긴네모꼴 대(臺)를 만들었다.
이 산성은 고구려의 왕도로 접근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의 요충을 가로막은 것으로서, 집안현 청하향 대천촌(大川村)의 북쪽에 있는 대천초잡(大川哨卡)을 전초(前哨:적을 경계하기 위하여 적에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된 부대)로 한 군사적 요새였다.
서기 324년 모용황의 침입 때에 이곳에서 침략군을 물리쳤다고 여겨지고 있다. 고구려 왕도의 북쪽 방어망은 보다 북쪽의 통화자안산성(通化自安山城)과 이도구문관애(二道溝門關隘)로 이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