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 3,018척. 현재 문지(門址)·수구(水口)·건물지와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단양군과 제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의 남쪽 끝 부분에 위치하며,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북쪽 강언덕의 험준한 암벽을 이용하여 북서쪽의 작은 계곡을 두른 입보용(入保用: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음)산성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둘레가 419보이고 성안에 세 곳의 샘이 있는데, 이 샘들은 가뭄에 마른다고 하였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말에는 왜구가 이곳까지 침입한 기록이 있고,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에서 단양·제천·청풍의 백성들이 피란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조선시대 초기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은 험준한 암벽을 그대로 이용한 곳이 많고 부분적인 성벽의 규모는 높이 1∼1.5m, 너비 1∼1.5m이며 비교적 큰 할석을 이용하여 쌓았다.
또한, 북문과 남문터가 개구부(開口部)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데, 남문터는 문구(門口)의 바깥쪽 입면(立面)이 凹모양으로 된 다락문의 모습으로 정남향의 능선의 잘룩한 부분을 택하여, 10여평의 대지를 정지하고 석벽과 좌우의 성루(城壘 : 성 바깥 둘레의 흙담)를 쌓았다.
북문터는 북서쪽으로 낮아지는 수구 부근에 있는데, 출입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과 석벽으로써 문기둥을 삼고 할석으로 고루쌓기를 하는 등 남문과 형식이 같으며 그 안쪽에 약간의 평탄한 건물터가 있다.
서쪽으로는 작은 통로가 있고 흙으로 만든 성벽의 안쪽 벽 위에 냇자갈을 무더기로 쌓아놓은 것이 두 무더기 남아 있어서, 피란하던 주민들이 농성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돌들은 대개 23×21㎝, 20×18㎝, 18×8㎝의 크기로서, 한 손으로 던져서 먼 거리의 적군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으로, 길이 6.5m, 너비 3.3m 정도의 평평한 능선 주변에 수만 개씩 쌓아놓았다.
남한강을 이용하여 죽령(竹嶺)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삼국시대부터 요새지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