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관성의 자리는 원래 고려시대에 적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진이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곽영이 호남지역의 왜적을 막기 위해 그 진 위에 석주관성을 축조하였다. 이것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위치한 요충지로, 1993년 11월 10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구례군청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석축산성인 석주관성(石柱關城)은 섬진강을 사이에 둔 요새지에 해당되며 경상남도 하동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이곳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이었고, 고려 말기에는 왜구(倭寇)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이곳에 성벽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이 남원에 진을 베풀고 11월에 이곳에 성을 쌓았다. 이곳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요새지로, 팔량치(八良峙)와 함께 축성되었고, 이때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지켰다. 1593년(선조 26)에는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한 후, 하동을 지나 남원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공격하기도 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왕득인(王得仁)이 의병을 거느리고 지키다가 이곳에서 장렬히 순절하였다. 이어 11월에는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王義成)과 이 지방 출신의 선비들인 이정익(李廷翼)·한호성(韓好誠)·양응록(梁應祿)·조정철(趙貞喆)·오종(吳琮) 등이 의병을 모아서 이곳을 지켰다. 특히 이들은 인근 화엄사의 승병 153명과 함께 양식 지원을 받아 왜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왕의성을 제외한 여러 의사들이 이때 순절(殉節)하였다. 이곳에서 싸운 의병장들을 ‘석주관칠의사(石柱關七義士)’라 하며, 1804년(순조 4) 성터 옆에 사당을 세웠다.
성벽은 지리산의 남쪽 줄기인 왕시루봉의 남방 칠봉산(七峰山)의 남향 능선을 이용하여 섬진강변까지 내외협축(內外夾築 : 중간에 흙이나 돌을 쌓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은 것)의 석축성벽과 토루(土壘)를 만든 길이 710m가 남아 있다. 돌로 쌓은 성벽은 너비 1.6∼0.8m, 높이 1∼1.6m의 규모로 7.9m 간격의 윗면 수평을 이루도록 축성되었다. 성벽은 단면이 사다리꼴을 이루며 두 곳에 망대터가 있다.
호남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관문으로서, 성벽은 엉근 막돌허튼층쌓기로 쌓았는데, 이러한 성벽은 우리 나라에서 매우 보기 드문 축조방법이다. 또한 능선 정상을 따라 암반을 이용한 축성기법 역시 축성법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