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필경』은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최치원은 당 고변(高騈)의 휘하에 4년여 동안 종군할 때 1만여 수의 시문을 지었는데, 신라로 귀국한 뒤 그가 직접 종군 당시 시문을 선별하여 20권으로 편찬하여 50수의 시와 320편의 문을 수록하였다. 최치원의 당나라 종사관 시절 대표 저작이며,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문집이다.
최치원(崔致遠)은 884년(헌강왕 10) 10월 중국 회남(淮南)에서 귀국길에 올라 이듬해 885년(헌강왕 11) 3월에 신라에 돌아왔다. 그리고 886년(정강왕 1) 1월에 당나라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휘하에서 막료 생활을 하면서 지은 작품을 모아 『계원필경』을 헌강왕에게 바쳤다.
『계원필경』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계원필경』 20권과 아울러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을 함께 바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계원필경』 20권만이 현전할 뿐이다. 고변의 휘하에서 4년간 창작한 시문은 1만여 수나 되었으나, 최치원은 그 중 일부를 직접 가려 뽑아 20권으로 편집하였다. 최치원은 『계원필경』의 서문에 “모래를 헤쳐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집(桂苑集)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戎幕)에 기식하며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계원필경』은 이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833년(순조 33)에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로 재직하였는데, 홍석주(洪奭周, 17741842)가 소장하고 있던 이 책의 간행을 부탁하자 편목과 의례를 그대로 두고 잘못된 글자를 교정하여 1834년 전주에서 다시 간행하였다. 이때 간행된 판본을 바탕으로 한 20권 4책, 10행 20자의 정리자본(整理字本)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MF35-1750)과 국립중앙도서관(M古3-2002-8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4220) 등에 소장되어 있다. 서유구가 간행한 것이 1972년 6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에 전편이 수록되었으며, 1990년 7월 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간한 『표점영인 한국문집총간(標點影印韓國文集叢刊)』에도 수록되었으며,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완역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은 『계원필경』을 “우리 동방의 시문집이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부득불 이 문집을 개산비조(開山鼻祖)로 삼으니, 이는 동방 예원(藝苑)의 본시(本始)이다.”라고 일컬었다. 현전하는 최고 최초의 개인 문집인 것이다.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재직할 때의 작품인 만큼 우리나라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시문이 대부분이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은 고려인이며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고변의 회남종사(淮南從事)가 되었다. 문집인 『계원필경』 20권과 『사륙(四六)』 1권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계원필경』이 『신당서』에 실릴 만큼 국제적인 저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원필경』 서문 말미에 “중화 6년 정월일 전도통순관 시어사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 장주[中和正月日前都統巡官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猿狀奏]”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 받은 관직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 연호를 적고 있음이 특이하다. 이 때문에 『계원필경』을 사대문학의 남상(濫觴)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신라가 당나라의 법제를 대부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계원필경』이 1,000여 년을 두고 인멸되지 않고 계속 간행된 까닭은 후대 과문(科文)의 한 전범(典範)으로 원용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문집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의 유려한 문체가 수많은 전고(典故)를 담은 채로 수록되어 있다.
이 문집과 함께 왕에게 올린 8권의 저술 이외에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과 문집 30권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에 이를 참고하였음은 분명하다.
최치원의 정치적 경륜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894년에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 時務十餘條)」가 있다. 지금 전하지는 않지만 후세 정치가들의 상소문의 모범이 되었다.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은 후대에 와서 여러 책에 실린 최치원의 글들과 금석문에서 나온 것들을 모아 후손 최국술(崔國述)이 1926년에 편찬하였다. 같은 해에 최면식(崔勉植) · 최영하(崔榮夏)가 또한 편찬한 바 있다.
『고운선생문집』에서 그의 진면목을 보다 요연하게 접할 수 있다. 『계원필경』은 최치원 자신의 느낌과 감상을 적은 글은 거의 없다. 대부분 고변을 위하여 대작(代作)한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깊은 관계가 없는 생소한 중국의 사실들로 점철되어 있다.
『계원필경』 20권의 체재와 내용은 서문을 서두로 하여 권1 · 2에 표(表) 20수, 권3에 장(狀) 10수, 권4 · 5에 주장(奏狀) 20수, 권6에 당장(堂狀) 10수, 권7∼10에 별지(別紙) 80수, 권11에 격서(檄書) 4수와 서(書) 6수, 권12 · 13에 위곡(委曲) 20수, 권14에 거첩(擧牒) 50수, 권15에 재사(齋詞) 15수, 권16에 제문 · 서(書) · 소(疏) · 기 10수, 권17에 계(啓) · 장 10수, 권18에 서(書) · 장 · 계 25수, 권19에 장 · 계 · 별지 · 잡저 등 20수, 권20에 계 · 장 · 별지 · 제문 · 시 등 40수로 구성되었다.
『계원필경』 권1∼5까지는 고변이 황제에게 올리는 표와 장을 최치원이 대필한 것이다. 권6∼권10까지는 고관대작들에게 주었던 공문별지(公文別紙)이다. 권11은 유명한 「격황소서( 檄黃巢書)」를 비롯한 격문과 서(書)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받는 이들을 설득시키는 힘이 강한 변려문으로 많은 고사를 인용한 화려한 문체이다. 풍부한 고사와 적절한 대구(對句)와 압운(押韻)은 후세인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최치원의 변려문은 이덕무(李德懋)와 홍석주에게 “중국에서 유행이 지나 한물간 문체를 모방한 아류(亞流)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받았다. 그의 문재(文才)는 후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계원필경』 권15의 「재사」 15수는 당대(唐代)의 도교(道敎)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고, 권16의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는 월남(越南)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권17에서 사도상공(司徒相公)인 고변에게 중국 역대의 영웅들을 나열하여 그에게 대비시키며 칭송한 「기덕시(記德詩)」 30수는 주제가 너무 노골적이어 시로서의 품격이 떨어진다. 시를 통하여 그의 상사인 고변을 장량(張良)에 비유하여 천하를 평정한 국태민안의 주역으로 과대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안남(安南)」이라는 시에서는 남만(南蠻)인 안남을 마음껏 멸시하고 있다.
『계원필경』 권20은 귀국 직전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자신의 정감을 읊고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이다. 「사허귀근계(謝許歸覲啓)」에서는 자신의 짙은 정회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삼가 저는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지금 벌써 스물아홉이 되었습니다. 백 번 천행(天幸)으로 살아나 덕문(德門)에 의탁함을 얻고, 갑자기 관영(官榮)을 더하여 이에 명복(命服)을 더럽혔으니, 일신에 조우(遭遇)가 만 리에 빛납니다. 따라서 멀리 있는 어버이는 문에 기대던 생각이 조금 위로될 것이고, 떠났던 자식은 벼슬을 얻은 것이 영광스럽습니다.……그러나 고향을 이별한 지 오래되고 바다에 뜰 길이 먼 지라 머무르려니 까마귀의 정에 마음이 상하고 떠나려니 견마(犬馬)의 그리움을 품게 됩니다. 오직 바라는 바는 잠깐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와서 모셔서 우러러 어지신 봉토에 의탁하여 영원히 비루한 자취를 편안하게 하겠습니다.”
「사허귀근계」에는 조국과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과 당나라에서 얻은 영광이 얽힌 착잡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금의환국(錦衣還國)의 꿈에 부푼 최치원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당나라에서 얻은 모든 영광을 고국의 어버이에게 보인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당나라를 떠나 고국에 가 있다. 이에 귀로의 뱃길의 무사함을 비는 간절한 마음이 「제참산신문(祭巉山神文)」에 절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최치원은 토속신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것처럼 보이며, 중국의 민속 신앙에도 긍정적이었다. 민속 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신라 화랑도의 풍류(風流)를 유불선(儒佛仙)을 수렴하는 주체로 파악한 그의 의식과도 접맥된다.
『계원필경』에는 시가 60수 정도 된다. 그 중에서 권17의 시 30수는 송덕시(頌德詩)인 만큼 문학적 가치에는 한계가 있다. 권20의 시 30수는 이와는 달리 진솔한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혁명을 노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야소(野燒)」에서는 난세에 옥과 돌이 구분도 없이 타버리는 현실을 박진감 있게 노래하고 있다. 『계원필경』의 「산정위석(山頂危石)」에는 자존(自尊)의 긍지와 이기적인 세태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다. 그가 귀국할 무렵에는 당나라도 이미 국운이 쇠퇴하고 있었다. 신라 또한 계림황엽(鷄林黃葉)의 만종이 울리는 때였다. 그는 후삼국의 난세에서 반유반선반불(半儒半仙半佛)의 내면적 갈등에서 신음하기도 하였다.
『계원필경』은 고변을 위한 대필과 공식 문서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중국의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나라의 저술에 머무르지 않고 동양의 명저로 자리를 굳힌 책이다. 따라서 최치원의 진면목은 오히려 『고운선생문집』에서 찾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는 후삼국의 난세를 살면서 국론의 분열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하면서 방랑의 삶을 살다가 만년에는 해인사에 들어가 은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