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는 894년(진성왕 8)에 신라의 최치원이 진성왕에게 올린 사회개혁안이다. 6두품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신라 왕실의 안녕과 신라 국가의 위상을 강조한 존왕적 정치 이념을 담았다. 그러나 왕권이 이미 약화된 채 진골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고 호족 세력이 지방 곳곳에서 성장한 상황에서 실현되기에는 버거웠다. 후삼국 시기 사회 혼란 수습 요구가 부각되면서, 최치원을 계승한 최언위나 최승로 등 신라 출신 유학 지식인에 의해 강조되어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최치원(崔致遠) 귀국 후 신라 곳곳에서는 초적이 봉기하여 사회 혼란이 점점 심해졌다. 당시 최치원은 병부시랑과 대산군(大山郡) · 부성군(富城郡) 태수를 맡았다. 진성여왕은 재당 시절에 혼란한 당 사회를 직접 경험하였던 최치원을 통해서 반란을 진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을 실현하면서 지방 사회를 위무하고자 하였고, 최치원도 자신의 능력을 펼치려고 지방관을 자임하였다.
893년(진성여왕 7) 견당사 사행이 도적 때문에 막혀 실패하자, 최치원은 중앙 정계로 돌아와 지서서원사(知瑞書院事)를 맡아 894년 2월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시무십여조 진상 이전에 편찬하거나 작성하였던 『 계원필경(桂苑筆耕)』과 『 사산비명(四山碑銘)』의 내용과 연관되었을 것이다.
『계원필경』에서는 당 사회의 혼란을 일으켰던 반적(叛賊)들을 다스리는 입장과 함께 인(仁)・효(孝)에 밝은 군왕의 자질을 강조하면서 군왕의 덕화 정치와 도(道)의 추구를 부각하였다. 『사산비명』에서는 군왕이 유교적 정치 이념을 구현하여 군자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는 유학적 소양을 가진 6두품 유학 지식인을 등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시무십여조에는 우선 국학(國學)을 통한 유학 교육의 강화, 도당 유학생 파견과 그 활용 방안 모색, 문한기구의 확장과 문한관의 관직 서열상 승격 도모, 유학적 소양을 기준으로 한 관료 임용과 승진 방안 구축이 담겼을 것이다. 또한 지방민 유망을 방지하는 제도적 보완 장치 마련, 유망의 원인인 수취 제도의 개선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편 등이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군왕의 교화로 설득되지 않는 반국가 세력에 대한 철저한 응징 방안도 담겼을 것이다. 진성여왕이 기뻐하며 최치원을 아찬의 관등을 내렸고, 최치원이 헌강왕 때 이후 왕실 측근 문한관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아, 시무십여조의 진상에는 진성왕의 요청도 반영되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