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장왕(哀莊王)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청명(淸明)이다. 뒤에 중희(重熙)라 개명하였다. 원성왕의 장손인 소성왕(昭聖王)과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다.
800년 6월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소성왕의 어머니이자 원성왕의 아들 혜충태자(惠忠太子) 김인겸(金仁謙)의 비인 성목태후(聖穆太后)와 작은아버지인 병부령(兵部令) 김언승(金彦昇)이 섭정하였다. 김언승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여 헌덕왕이 되었으므로, 섭정은 애장왕 재위 내내 유지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805년(애장왕 6) ‘공식(公式) 20여조’ 반포를 계기로 애장왕이 친정(親政)을 하였고, 그 뒤에도 군읍의 경계를 새로 정하는 등 개혁 정책을 펴나가자 김언승이 애장왕을 시해하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공식 20여조 반포와 군읍 경계 획정은 중앙과 지방 제도의 개혁 조치로 볼 수 있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東宮)의 만수방(萬壽房)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는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조처로 보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취해진 공식 20여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 개혁으로 여겨진다.
805년 위화부(位和府)의 금하신(衿荷臣)을 고쳐 영(令)이라 하고, 예작부(例作府)에 성(省) 두 사람을 둔 관제 개혁 조처도 같은 성격으로 이루어졌다. 애장왕 대 관제 개혁은 「직관지(職官志)」에 보다 더 상세한데, 성전(成典) 계열의 관부와 위화부의 장관 · 차관의 명칭을 여타의 관직과 마찬기지로 한식(漢式)인 영(令) · 경(卿)으로 통일하고, 일부 사원성전(寺院成典)과 예작부 · 선부(船府) · 상사서(賞賜署)의 관원 수를 감원하여 가능한 한 다른 관부의 해당 관원과 그 수를 같게 함으로써 통일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806년에는 교지를 내려 불교 사찰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오직 수리만을 허락하였다. 또 금수(錦繡)로 불사(佛事)하는 것과 금 · 은으로 기물(器物)을 만드는 것을 금하였다. 이 조처 역시 2년 뒤에 지방 군현(郡縣)의 경계를 정한 일과 연관된다.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나 재력과 함께 지방에 연고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체로 원당(願堂)과 같은 사찰을 세워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애장왕 7∼9년에 걸쳐 단행된 개혁 조처는 귀족 세력을 왕권에 복속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한 애장왕의 개혁 조처는 중대(中代)의 전제주의(專制主義)가 무너지고 귀족 세력이 난립하는 하대(下代) 사회의 풍조 속에서 많은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 결과 애장왕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애장왕 대의 개혁은 경덕왕 대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을 계승한 왕권 강화가 목적이었지만, 개혁의 주체는 애장왕이 아니라 당시 실력자인 김언승과 수종(秀宗)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때의 관제 개혁은 그 목적이 애장왕의 왕권 강화라기보다는 김언승과 그 일가의 권력 집중을 위한 것이었다.
애장왕 즉위 시 병부령의 관직에 있던 김언승은 왕의 즉위와 동시에 섭정이 되고, 이듬해 애장왕 2년(801년) 어룡성(御龍省) 사신(私臣)을 겸직하였다. 이후 상대등(上大等)에 오르는데, 이로써 김언승은 왕에 버금가는 정치적 위상을 획득하였다. 김언승은 애장왕 대 일련의 관제 개혁을 통해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여 지휘 감독을 일원화하고, 귀족과 사찰 세력의 결합을 억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애장왕은 국내 정치의 개혁과 병행해 대당외교(對唐外交) 외에 일본과도 국교를 맺었다. 802년 12월 김균정(金均貞)을 대아찬(大阿飡)에 임명하고 가왕자(假王子)로 삼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803년에는 일본과 수교하였다. 그리하여 804년, 806년, 808년에 각각 일본국 사신이 내조(來朝)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응(順應) · 이정(利貞)에 의해 가야산에 해인사(海印寺)가 세워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였다. 809년 7월 김언승이 김제옹(金悌邕)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쳐들어 와 왕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