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대 원성왕의 손자이며, 예영태자(禮英太子)의 아들이다. 처음에 진교부인(眞矯夫人 또는 貞矯)과 혼인하고 뒤에 사촌형인 김충공(金忠恭)의 딸 조명부인(照明夫人 또는 昕明夫人)과 혼인하였다. 진교부인과의 사이에서 제45대 신무왕을 낳고, 조명부인과의 사이에서 제47대 헌안왕을 낳았다.
802년(애장왕 3) 대아찬이 되었으며, 이 때 조정에서 그를 가왕자(假王子)로 삼아 일본에 인질로 보내려 했으나 사양하였다. 812년(헌덕왕 4) 봄에 시중(侍中)으로 승진했다가 814년 8월 김헌창(金憲昌)과 교체되었다.
822년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이던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찬(伊飡)으로서 김웅원(金雄元), 그리고 아들인 대아찬 우징(祐徵)과 함께 삼군을 장악해 단시일 내에 반란을 성공적으로 토벌하였다. 828년(흥덕왕 3) 7월에는 일가의 원찰인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비학산(飛鶴山)의 법광사(法光寺)에 삼층석탑을 건립하였다.
835년 2월 김충공의 후임으로 상대등이 되었으나, 이듬 해 12월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아들 우징과 조카 예징(禮徵) 그리고 김양(金陽) 등의 추대를 받아 그의 종질 제륭(悌隆)과 왕위 경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시중이던 김명(金明) 등의 지지를 받은 제륭과 궁궐 안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패배해 살해되었다. 뒤에 아들 우징이 왕위에 오르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