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영창궁과 왕실 사원의 건립, 운영, 제사 의례 등을 지원하던 관부.
설치 목적
기능과 역할
변천사항
참고문헌
원전
- 『삼국사기(三國史記)』
- 성덕대왕신종명문(聖德大王神鐘銘文)
-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논문
- 남동신, 「신라의 승정기구와 승정제도」(『한국고대사논총』 9,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0)
- 윤선태, 「신라의 사원성전과 금하신」(『한국사연구』 108, 한국사연구회, 2000)
- 채상식, 「신라통일기의 성전사원의 구조와 기능」(『부산사학』 8, 경남사학회, 1984)
- 이영호, 「신라중대 왕실사원의 관사적 기능」(『한국사연구』 43, 한국사연구회, 198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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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경상북도 경주시 효명동에 있던 신라 때의 절. 진흥왕의 비(妃)가 스스로 여승이 되어 살던 곳으로, 신문왕 4년(684)에는 성전(成典)이라는 관청을 두어 사찰을 유지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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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신라 때에, 사천왕사를 관리하던 관아. 경덕왕 18년(759)에 사천왕사성전을 고친 것으로, 감령(監令) 1인, 경(卿) 1인, 감(監) 1인, 주부(主簿) 2인, 전(典) 2인을 두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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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통일 신라 시대에, 봉성사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경덕왕 18년(759)에 봉성사 성전을 고친 것으로,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봉성사 성전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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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통일 신라 시대에, 봉덕사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경덕왕 18년(759)에 봉덕사 성전을 고친 것으로,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봉덕사 성전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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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통일 신라 시대에, 영묘사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경덕왕 18년(759)에 영묘사성전을 고친 것으로,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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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신라 때에, 영흥사를 관리하던 관아. 경덕왕 18년(759)에 영흥사 성전(永興寺成典)을 고친 것으로, 감(監) 1인과 사(史) 3인을 두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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