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이다. 일찍이 아도(阿道)가 과거칠불(過去七佛) 중 제5 구나함불(拘那含佛)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지명하였던 곳이며, 원래 큰 연못이었는데 선덕여왕 때 두두리(頭頭里)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후 선덕여왕이 이 절에서 개구리가 3, 4일 동안 계속해서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의 복병이 여근곡(女根谷)에 숨어들었음을 감지하였다는 일화를 남긴 사찰로도 유명하다.
또한, 사천왕사(四天王寺)와 더불어 양지(良志)의 작품이 가장 많이 간직되었던 사찰이다. 금당(金堂)에 모셔져 있던 장륙삼존불(丈六三尊佛)을 비롯하여 천왕상(天王像)과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도 모두 양지가 만든 것이었다.
장육삼존불을 만들 때는 신라 사람들이 다투어 불상을 만들 진흙을 운반하면서 향가인 「풍요(風謠)」를 지어 불렀다고 하며, 이것이 일할 때 일꾼들이 노래를 부르며 작업능률을 올리게 하는 풍습의 시초였다고 한다. 그 뒤 764년(경덕왕 23)에 이 절의 장륙삼존불을 개금하였다는 기사와 1460년(세조 6)에 봉덕사의 신종(神鐘)을 이 절로 옮겨 안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한다. 따라서 이 절은 조선 초기 이후에 폐허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절터에서는 금당터를 비롯하여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있었던 두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 밖에도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고, 영묘사(靈妙寺 또는 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간혹 발견되고 있으며, 근처의 민가에는 이 절터에서 옮겨간 주춧돌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