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은 조선시대 판선교도총섭, 팔도도총섭, 규정도총섭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자는 징원(澄圓)이고 호는 벽암(碧巖)이며 각성은 법명이다. 10세에 출가하여, 부휴의 제자가 되어 속리산, 금강산 등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해전에 참여하였다. 1624년 팔도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을 완성하였다. 1646년 화엄사에서 86세로 입적하였다. 선과 교에 모두 뛰어나 정혜쌍수와 교관겸수를 실천하였고, 화엄 등 교학에도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선원집도중결의』, 『간화결의』, 『석문상의초』가 있다.
10세에 설묵(雪默)에게서 출가하였으며,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뒤 부휴 선수(浮休善修)의 제자가 되어 속리산 · 덕유산 · 가야산 · 금강산 등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해전에 참여하였다. 1600년에는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강석을 열었다. 1612년(광해군 4)에 스승인 선수가 무고로 투옥되자 그도 연루되어 옥에 갇혔지만, 광해군이 그의 덕에 감복하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에 임명하여 봉은사에 머물게 하였다. 그곳에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을 비롯한 많은 사대부와 사귀었다. 부휴 선수의 문하에서 20여 년을 수행하고 법을 전수받았다. 1617년 광해군이 청계사(淸溪寺)에서 큰 재를 열었을 때 설법하였다.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키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과 함께 의발을 하사받았다. 1632년 구례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으로 만들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승군 3,000명을 모아서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인조의 항복 소식에 통곡하며 돌아왔다. 전쟁이 끝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도중결의(圖中決疑)』와 『참상선지(參商禪旨)』 등을 저술하였다.
1640년 봄 쌍계사(雙磎寺)를 중수하였고, 그 해 8월에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원두표(元斗杓)의 청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 직을 맡아서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사고를 보호하였다. 1641년(인조 19) 백운산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으며, 1642년 조정에서 천거하여 일본행 사신으로 삼았는데, 선사는 서울로 가다가 노환으로 되돌아왔다. 한편 효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주(安州)에서 만나 화엄(華嚴)의 종지(宗旨)를 물어서 답한 적도 있다. 1646년 희언(熙彦)과 속리산 보은 법주사에 은거하다가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86세, 법랍 73세였다.
선과 교에 모두 뛰어나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실천하였고, 화엄 등 교학에도 정통하였다. 은혜를 잊지 않는다,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잠언(箴言)을 지어 스스로 지키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취미 수초(翠微守初)와 백곡 처능(白谷處能)이 있으며, 문하의 제자들이 취미파(翠微派) · 백곡파(白谷派) · 침허파(枕虛派) · 고운파(孤雲派) · 동림파(東林派) · 연화파(蓮花派) · 벽천파(碧川派) 등 7파로 나뉘어 그의 선법을 크게 전파하였다. 저서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간화결의看話決疑』,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가 있으며, 스승의 시문집인 『부휴당집(浮休堂集)』 5권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