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군은 나라의 위난을 구하기 위하여 승려들이 조직한 군대이다. 승병, 치군, 의승군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때부터 승병이 활동하였다고 한다. 1104년(숙종 9) 고려시대에는 항마군이라는 명칭으로 정규군에 편입되었다. 1216년(고종 3) 8월 거란이 침범하자, 승군 수백 명이 참가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억불정책 때문에 승군을 조직할 수 없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은 의승군을 모아 참전하였다. 한양 수복 후에는 성을 쌓고, 왕조실록을 수호하는 등 관군에 준하는 형태로 변해 갔다. 승군은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 처음으로 승군이 생겨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이른 시기인 고구려 때부터 승군이 활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나라의 100만 대군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을지문덕은 살수의 강물을 막아 적병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오도록 유도하였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다. 이때 가사(架裟)를 입은 7명의 승려가 나타나서 발을 걷고 강을 건넜으므로, 적병들이 속아서 강을 건너게 되어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신라의 승려 도옥(道玉)은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했을 때,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진에 들어가 기습공격을 하여 신라군에게 승리의 계기를 만들어준 뒤 전사하였다.
백제의 도침(道琛)은 나라가 망하자 복신(福信) 등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에 힘쓰는 한편, 임존성(任存城)을 중심으로 패잔병을 재조직하였고, 신라 및 당나라 군사와 싸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복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또 통일신라 말기의 난세에는 해인사에서 승군을 조직하여 난도(亂徒)들의 공격으로부터 사찰의 식량과 재산을 자체적으로 방위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국가에 위난이 있을 때에는 승려들이 승군을 조직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고려시대 승군에 관한 기록은 1104년(숙종 9) 항마군(降魔軍)이라는 명칭으로 정규군에 편입된 때부터이며, 그 뒤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마다 승군을 차출하게 되었다.
1010년(현종 1)에 거란의 침략으로 서경이 위기에 놓였을 때, 승장 법언(法言)은 사정(思政) 등과 함께 9,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에 진을 치고 거란병을 공격하여 적병 수천 명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올렸으나, 법언은 순국하였다.
인종 때에는 관선(冠宣)과 상숭(尙崇) 등이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1174년(명종 4) 1월 이의방(李義方)이 난을 일으켰을 때, 중흥사(重興寺) 승군 2,000여 명과 의승병들은 이의방을 죽이고, 나머지 역도들을 모두 섬멸하였다.
또 1176년(명종 6) 공주에서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켰을 때에도 승군의 활동이 컸으며, 1182년(명종 12) 죽동(竹同)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안찰사 박유보(朴惟甫)가 이끈 관군은 죽동에게 패하였으나, 승군이 출병하여 그 난을 진압하였다.
1216년(고종 3) 8월 거란이 우리나라 서북쪽 국경을 침범하자, 조정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때 승군 수백 명이 참가하였다. 특히 몽고의 침략 때에는 김윤후(金允侯)의 활약이 뛰어났다.
원나라가 살례탑(撒禮塔)을 도원수로 삼아 2차침략을 하여 처인성을 공격하였을 때, 승려였던 김윤후는 활을 쏘아 살례탑을 죽였고, 원나라가 4차침략을 하였을 때에는 충주산성 방호병감(防護兵監)이 되어 70여 일 동안 산성을 수호하여 적군을 물러가게 하였으며, 1254년(고종 41)의 제5차침략 때에도 충주성의 함락을 막았다.
이 5차침략 때 상주산성을 지키고 있던 승장 홍지(洪之)는 백발백중의 실력으로 적의 지휘관을 사살하고 사기를 꺾었으며, 여러 차례의 공방전으로 적의 병력 반 이상을 살상하여 적을 물리쳤는데, 이 5차침략 때 함락되지 않은 성은 충주성과 상주성뿐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승군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였다. 1359년(공민왕 8) 12월 홍건적의 침입이 있게 되자, 선교양종의 승려들이 참여하여 이들을 막았고, 전국의 사찰에 있던 말을 군용으로 보충시켰다.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세우고 화약제조술을 중국에서 도입하였을 때, 1급의 비밀에 속한 기술요원은 승군에서 충당하였고, 화통을 쏘는 포군(砲軍)은 서울과 각 지방의 사찰에 인원수를 할당하여 조직하였다.
1378년(우왕 4) 3월에는 대마도의 왜구와 강화도 인근의 왜구가 개경의 함락을 목적으로 대거 침략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와 양광도에서 1,000인의 승군과 교주 · 서해 · 평안도에서 각 500인의 승군을 차출하여 병선을 제조하고 화약병기를 사용하여 적을 물리치게 하였으며, 1388년 4월 승군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았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승려 자체의 군사조직을 만들 수가 없었다. 오히려 무도첩승(無度牒僧)을 환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때를 같이하여 승군의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무도첩승을 승군으로 동원하여 일정 기간 성곽 또는 요새를 수축하게 한 뒤 그 대가로서 호패(號牌)를 급여하고 신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뒤의 무도첩승은 모두 환속시켜 군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무도첩승과 도첩승을 가리지 않고 모두 승군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왜변이 끝난 뒤에도 수년 동안에 걸쳐서 배를 만들거나 성을 쌓는 일에 동원하였다.
① 전란기의 승군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休靜)은 전국 사찰에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승군(義僧軍)이 궐기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싸움은 영규(靈圭)의 청주성발성(淸州城拔城), 처영(處英)의 행주산성대첩을 비롯하여 유정(惟政)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평양탈환 때의 모란봉전투(牡丹峰戰鬪)와 도성수복 때의 수락산전투 · 노원평전투 · 송교전투 등을 들 수 있다.
유정이 의주에서 조정으로부터 도총섭(都摠攝)의 직첩을 받은 것은 1592년 7월이었는데, 휴정은 그 이전부터 600명의 승군을 조직하여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 승군은 뒷날에 조직된 법흥진(法興鎭) 승군의 모체가 되었다.
유정은 강원도에서 궐기한 150명의 승군을 이끌고 황해도를 거쳐서 1592년 10월 평양성 동쪽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수는 700명이 넘었다. 다시 그들이 법흥진으로 갔을 때, 법흥진의 총 승군병력은 5,000명에 이르렀다. 평양탈환 직전인 11월부터 평양과 중화지방의 적군을 차단하는 작전에 임했던 법흥진승군은 평양탈환전에서도 유정의 지휘 아래 난공지점인 모란봉 방면을 담당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산악지대의 지세와 지형을 평소 잘 숙지하고 있었던 승군이었으므로 평양탈환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북관(北關)에서의 적의 동태를 정찰하는 임무도 담당하였다. 승군은 의병과는 달리 끝까지 관에 의해 해체를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군의 재정비와 명나라 군사가 온 뒤부터는 한편으로 싸움에 임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량미 수송도 담당하게 되었다. 또 한양의 수복 후에는 성을 쌓는 일을 담당하는 등 관군에 준하는 형태로 변하여 갔다.
전후 7년 동안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승군의 활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라도 무주지방에서의 공방전과 경기도에서의 죽산전투 등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유정은 한양 수복 후에도 영남지방에서 왜구들과 싸우는 한편, 성을 쌓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도산성공격(島山城攻擊)과 예교총공격(曳橋總攻擊)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휴정의 뒤를 이어 직첩 없이 도총섭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승병장으로는 휴정 · 유정 · 영규 · 처영 외에도 『선조실록』에는 많은 승려들의 기록이 있다.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는 데 공이 컸던 법견(法堅), 정보를 담당했던 행사(行思), 죽산성을 쌓았고 그 성의 수비대장을 겸했던 영주(靈珠), 담양옥천사에서 봉기한 인준(引俊), 용진의 월계산성(月溪山城) 수축의 책임을 맡았던 견우(見牛), 경상도에서 봉기하여 전공을 많이 세운 해안(海眼)이 있다.
그리고 서산대사의 부상으로 평양탈환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인오(印悟)와 천연(天淵), 평안도 · 황해도 일대의 수비대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법정(法正), 여천 일대의 무기고 수비에 공이 컸던 혜희(惠熙), 이순신의 해군에 편입되어 작전을 편 의능(義能), 해전에 참여한 삼혜(三惠),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도총섭이 되었고 파사성(婆裟城)을 쌓았던 의엄(義嚴)도 유명하다.
또한 충청도 부여 출신으로 의승을 모집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적을 맞아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설미(雪尾), 경상우도총섭이 되어 군량미의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짓는 한편, 해인사에서 활과 화살 · 화약을 만들어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의승군에게 보급하고, 처음의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신열(信悅) 등이 있다. 또 1605년(선조 38) 4월 임진왜란 때의 군공(軍功)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공이 있었는데, 이때 공신이 된 34명의 승군은 다음 〈표〉와 같다.
등급(等級) | 관직(官職) 및 승명(僧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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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等) | 동지(同知) 유정(惟政), 승장(僧將) 영규(靈圭), 삼행(三行) |
2등(等) | 상호군(上護軍) 설헌(雪軒), 호군(護軍) 영오(靈悟), 부호군(副護軍) 처영(處英), 사과(司果) 희식(希式), 사과(司果) 처묵(處默), 의병장(義兵將) 홍정(弘靖), 해명(海明), 육정(六精), 혜근(惠根), 종인(宗印), 승보(勝寶), 도암(道庵), 한석(閑石), 사의(思義), 법관(法寬), 태원(太元), 옥준(玉俊), 덕응(德應), 의원(義元), 희인(希印), 호월(浩月), 호철(浩哲), 묘혜(妙惠) |
3등(等) | 부호군(副護軍) 사묵(思默), 사과(司果) 법근(法近), 사과(司果) 보훈(寶訓), 사용(司勇) 태헌(太軒), 도의(道義) |
〈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승군(僧軍) |
다른 한편으로 국가에서는 승군 동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1593년 8월에 도총섭 밑에 각 도마다 총섭 2명씩을 두게 하여 조직을 일원화하였다.
그러나 16총섭의 제도는 한정된 지역에서나마 실제로 선교양종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으므로, 각 도의 2명씩을 1명씩으로 줄였다가 적군이 북상할 기세를 보였던 1593년에는 경상도에 한해서 다시 2명을 두게 함으로써 유신들의 자가당착적인 정책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覺性)과 명조(明照) 등의 의승군이 활약하였다. 각성은 1624년(인조 2) 팔도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3,000명의 의승을 모아 항마군이라 이름한 뒤 스스로 승대장이 되어 북상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명조는 1627년 후금이 침략해 오자, 의승군 4,000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진을 쳐서 크게 전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미를 모아서 전선에 보내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② 전란기 이후의 승군
병자호란 후에 승군들은 산성의 수축 및 수호에 주력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곳으로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두었던 남한치영(南漢緇營)과 북한치영(北漢緇營)을 들 수 있다.
각성이 감독하여 쌓은 남한산성 안의 남한치영은 각 도에서 의승을 불러서 번을 서게 하였고, 성 안의 9개 사찰 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도총섭 1인 밑에 중군(中軍) 1인, 교령관 1인, 초관(哨官) 3인, 기패관(旗牌官) 1인, 성 안팎 10개 사찰의 원거승군(原居僧軍) 138명, 의승(義僧) 356인을 두었다.
북한치영은 1711년에 북한산성을 쌓음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 주위 7,620보에 장대(將臺) 3곳, 대문 4곳, 암문(暗門) 10곳을 비롯하여 도총섭이 있는 중흥사(重興寺)를 중심으로 태고사 · 노적사 · 서암사 · 경흥사 · 국영사 · 원각사 · 부황사 · 보광사 · 보국사 · 용암사 · 봉성암 등의 사찰이 있었으며, 이들 사찰에 승군들이 머무르면서 산성을 수호하였다.
승영에는 도총섭 1인과 중군 · 좌별장 · 우별장 · 천총(千摠) · 파총(把摠) · 좌병방(左兵房) · 우병방 각 1인, 교련관 · 기패관 · 중군병방(中軍兵房) 각 2인, 오기차지(五旗次知) 1인, 도훈도(都訓導) · 별고감관(別庫監官) 각 1인, 사료군(射料軍) 10인, 서기 2인, 통인(通引) 2인, 고직(庫直) 3인, 책장무(冊掌務) · 판장무(板掌務) 각 1인, 취수(吹手) 2인, 각사승장(各寺僧將) 11인, 수승(首僧) 11인, 의승 350인을 두었다.
이들 치영 외에도 역대 왕조실록을 둔 곳 가까이의 사찰인 강릉 월정사, 무주 적상산성, 봉화 각화사, 강화 전등사에 수호승군을 두어 실록 수호의 임무를 다하게 하였다. 이 승군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