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처인성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는 고려 시대 승려 김윤후와 관련된 성곽이다. 몽골군 침입 당시 처인성은 진위나 화성에서 급히 피난하기 적절한 곳이었다. 1232년에 김윤후도 피난하였다가 이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몽골의 살리타이를 사살하였다. 현재 처인성은 아곡리 마을 입구 해발 약 71m 정도 구릉의 끝부분에 성벽이 남아 있다. 성벽 규모는 둘레 약 350m, 높이 약 5∼6m이다. 처인성은 대체로 고려 시대에 군사적으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국난극복의 성지로 기록이 남아 있는 성터로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김윤후와 관련된 성곽.
개설
처인성이 위치한 지역은 용인에서 진위로 가는 교통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수원에서 평택으로 가는 교통로나 용인에서 안성(일죽)으로 가는 간선교통로에서는 벗어난 곳이다. 몽골군의 침입을 피하여 진위나 화성에서 급히 피난하기 적절한 곳이었다.
김윤후도 진위 백현원에서 처인성으로 피난하였다가 처인성에 모여든 백성들과 힘을 합쳐 몽골군과 싸웠다.
현재 처인성은 아곡리 마을 입구 해발 약 71m 정도 구릉의 끝부분에 평면이 마름모꼴 형태인 성벽으로 남아 있다. 현재 성벽 규모는 둘레 약 350m이고 높이 약 5∼6m이다. 외벽은 35°∼45° 가량 경사를 이루고 있어 윤곽이 뚜렷하다.
1979년 남서쪽 성벽 120m를 복원하였고 1980년에도 동 · 남 · 북쪽의 성벽 205m를 수리하였다.
역사적 변천
대체로 고려시대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대체로 고려시대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이 모두 무너졌고 군창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전기무렵에는 성곽으로서의 기능이 없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등 조선시대 유물들은 군창이 있었다는 기록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이후 중심토루를 측면으로 다시 흙을 다져올려 보축하는 방식으로 성벽을 완성하였다. 판축한 중심토루의 너비는 약 430㎝이고 전체 성벽의 너비는 560∼590㎝ 정도이다. 성벽의 너비로 보아 원래 성벽의 높이는 약 3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지의 규모는 폭 450㎝ 길이 600㎝ 정도이다. 성내부와 같은 높이까지 성벽을 절개하여 평탄한 바닥을 만들고, 3열의 기둥을 세운 후 위에 문루를 갖춘 출입문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고려시대 어골문 기와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문지는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에 불에 타서 형성된 숯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불에 타서 무너져 폐기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징
또한 칼, 창, 화살촉 등 무기류 등도 소량이지만 출토되었다. 토기 중에는 사각편병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만든 용기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처인성이 군사적으로도 활발하게 이용되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용인 처인성』(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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