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 ()

처인성 사장터 / 김윤후
처인성 사장터 / 김윤후
건축
유적
국가유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김윤후와 관련된 성곽.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처인성(處仁城)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지정기관
경기도
종목
경기도 시도기념물(1977년 10월 13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아곡리 산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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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처인성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는 고려 시대 승려 김윤후와 관련된 성곽이다. 몽골군 침입 당시 처인성은 진위나 화성에서 급히 피난하기 적절한 곳이었다. 1232년에 김윤후도 피난하였다가 이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몽골의 살리타이를 사살하였다. 현재 처인성은 아곡리 마을 입구 해발 약 71m 정도 구릉의 끝부분에 성벽이 남아 있다. 성벽 규모는 둘레 약 350m, 높이 약 5∼6m이다. 처인성은 대체로 고려 시대에 군사적으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국난극복의 성지로 기록이 남아 있는 성터로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김윤후와 관련된 성곽.
개설

처인성은 1232년(고종 19) 승려 김윤후가 처인부곡의 주민들과 함께 몽골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처인성이 위치한 지역은 용인에서 진위로 가는 교통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수원에서 평택으로 가는 교통로나 용인에서 안성(일죽)으로 가는 간선교통로에서는 벗어난 곳이다. 몽골군의 침입을 피하여 진위나 화성에서 급히 피난하기 적절한 곳이었다.

김윤후도 진위 백현원에서 처인성으로 피난하였다가 처인성에 모여든 백성들과 힘을 합쳐 몽골군과 싸웠다.

현재 처인성은 아곡리 마을 입구 해발 약 71m 정도 구릉의 끝부분에 평면이 마름모꼴 형태인 성벽으로 남아 있다. 현재 성벽 규모는 둘레 약 350m이고 높이 약 5∼6m이다. 외벽은 35°∼45° 가량 경사를 이루고 있어 윤곽이 뚜렷하다.

1979년 남서쪽 성벽 120m를 복원하였고 1980년에도 동 · 남 · 북쪽의 성벽 205m를 수리하였다.

역사적 변천

몽골군과의 전투기록으로 보아 처인성은 13세기 이전에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축조시기는 시굴조사에서 밝혀졌다. 시굴조사 과정에서는 주름무늬병, 선조문 평기와, 당초문 암막새 기와 등 신라말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늦어도 신라말 고려 초 경에는 성이 축조되어 처인현(처인부곡)의 치소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체로 고려시대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대체로 고려시대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이 모두 무너졌고 군창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전기무렵에는 성곽으로서의 기능이 없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등 조선시대 유물들은 군창이 있었다는 기록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처인성의 성벽은 순수한 토축성벽으로 자연 구릉 경사면을 최대한 살려서 축조하였다. 구릉 경사면 윗쪽에 흙을 쌓기 위한 기둥을 세우고 이것을 중심으로 토질이 다른 흙을 한겹씩 차례로 다져 올려 판축하는 방식으로 중심토루를 축조하였다.

이후 중심토루를 측면으로 다시 흙을 다져올려 보축하는 방식으로 성벽을 완성하였다. 판축한 중심토루의 너비는 약 430㎝이고 전체 성벽의 너비는 560∼590㎝ 정도이다. 성벽의 너비로 보아 원래 성벽의 높이는 약 3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지의 규모는 폭 450㎝ 길이 600㎝ 정도이다. 성내부와 같은 높이까지 성벽을 절개하여 평탄한 바닥을 만들고, 3열의 기둥을 세운 후 위에 문루를 갖춘 출입문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고려시대 어골문 기와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문지는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에 불에 타서 형성된 숯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불에 타서 무너져 폐기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징

시굴조사에서 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와와 다양한 종류의 토기와 도기 등 생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성내부의 경사면과 저지대에서는 폐기된 유물이 포함된 교란층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는 신라말에서 고려시대까지 성내부에 관아와 마을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칼, 창, 화살촉 등 무기류 등도 소량이지만 출토되었다. 토기 중에는 사각편병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만든 용기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처인성이 군사적으로도 활발하게 이용되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국난극복의 성지로 기록이 남아 있는 성터로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다만 아직 시굴조사가 일부 진행되었을 뿐 정밀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용인 처인성』(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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