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경기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및 강원도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고려의 지방제도에서 안찰사(按察使)가 파견된 5도(五道)의 하나이다. 1018년(현종 9) 기준으로 관내에 총 111개의 군현(郡縣)이 설치되었으며, 목관(牧官)이 광주(廣州), 청주(淸州), 충주(忠州) 등 3곳, 지주사(知州事)가 양주(楊州), 원주(原州), 수주(樹州, 지금의 인천 계양구),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 공주(公州) 등 6곳, 지부사(知府事)가 천안부(天安府) 1곳, 현령관(縣令官)이 강화현(江華縣)과 가림현(嘉林縣,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 등 2곳이 있었다.
이 가운데 양주는 1104년(숙종 9)에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하였고, 수주(樹州)는 1150년(의종 4)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승격하였다. 소성현(邵城縣, 지금의 인천)은 숙종 때 경원군(慶源郡)이 되었다가 인종 때 인주(仁州)로 승격하여 지주사가 되었고, 부성현(富城縣, 지금의 서산)은 1143년(인종 21)에 현령관으로 승격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사』 지리지를 기준으로 유수관 1곳, 목관 3곳, 도호부 1곳, 지주사 5곳, 지부사 1곳, 현령관 3곳이 되었다.
1018년에 계수관(界首官)을 설치한 뒤 몇 개의 계수관을 묶어 사신을 파견하는 단위인 도(道)를 편성하였다. 1056년(문종 10)에 무문사(撫問使)를 파견할 때 양광도 지역은 충 · 경 · 상주(忠慶尙州)와 진 · 라 · 전 · 청 · 광 · 공 · 홍주(晋羅全淸廣公洪州)의 두 권역에 나뉘어 속하였다.
1087년(선종 4)에 출추사(出推使) 파견에서는 광충청주도(廣忠淸州道)로 편성되었는데, 이것은 양광도 권역의 3개 계수관을 연결하여 부른 것으로서 양광도가 처음 형태를 갖춘 사례이다. 1107년(예종 2)에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할 때에는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하여 새로 계수관이 된 양주, 곧 남경까지 포함하여 도명(道名)을 만들었다.
1109년(예종 4)에 근신(近臣)을 파견할 때에는 남경광주(南京廣州)와 충청주(忠淸州)의 두 권역으로 편성하였는데, 이는 양광도 권역을 남북(南北) 형태로 나눈 것이다. 1178년(명종 8)에 찰방사(察訪使)를 파견할 때에는 양충주도(楊忠州道)와 광청주도(廣淸州道)로 나누어 운영하였는데, 이것은 동서(東西) 형태로 나눈 것이다.
서해도에 처음 파견된 안찰사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파견 대상이 된 도가 점차 고정되어 갔다. 양광도 권역은 통상 4개의 계수관을 묶은 양광충청주도의 형태로 편성되었으나 때로는 2개의 도로 나누어 운영하기도 하였다.
1173년(명종 3)에 안찰사로 하여금 권농사(勸農使)를 겸임하도록 한 기사에는 7도안찰사(七道按察使)에 충청주도(忠淸州道)와 양광주도(楊廣州道)가 따로 편성되었다. 양광도는 영역이 넓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2개의 도로 나누기도 한 것인데, 안찰사를 파견하는 데에도 그러한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같은 원리에서 경상도 권역은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로 나누어 운영하기도 하였다.
명종 초에 최척경(崔陟卿)이 양광충청이도안찰사(楊廣忠淸二道按察使)가 되었다는 기사가 보이고, 이승휴(李承休)는 충렬왕 대에 양광충청이도(楊廣忠淸二道)에 안찰사로 나가 탐관오리를 탄핵한 사실도 확인된다. 곧 2개의 도로 편성하기는 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1명의 안찰사가 겸임한 것으로서 결국 두 권역은 통합되어 하나의 도로 확립되었다.
이렇게 통합된 도를 양광도 또는 충청도라고 불렀다. 명칭상으로는 서로 구분되는 권역처럼 보이지만, 고려 후기 기록에서 도를 열거할 때 양광도와 충청도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없어 양자가 같은 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25년(고종 12)에 안찰사를 파견한 기록에서는 양광도로 나오지만, 1235년(고종 22) 기록에서는 충청주도로 나오며, 이후에는 주로 충청도가 사용되었다. 이로 보아 고려 말에는 충청도가 일반적인 도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 경기(京畿)가 확대 개편되고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래 양주(남경)와 광주가 관할하던 지역은 대부분 경기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충청도로 확정되면서 조선의 8도를 구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