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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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북한산 중흥사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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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북한산에 있었던 의승군(義僧軍)의 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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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북한산에 있었던 의승군(義僧軍)의 병영.
개설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 4월 축성에 착수하여 9월에 완료하였는데, 이 산성은 난시에 임금이 거처하고 만일의 경우 도성의 백성도 수용할 목적으로 축조하였다. 축성 때에는 전국의 승려들이 동원되어 성능(性能)의 감독 아래 부역에 임하였으며, 성이 완공되자 나라에서는 남한치영(南漢緇營)과 같이 치영을 설치하여 의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내용

승영(僧營)인 치영은 승대장(僧大將) 1인, 중군(中軍)·좌우별장(左右別將)·천총(千摠)·파총(把摠)·좌우병방(左右兵房) 각 1인, 교련관(敎鍊官)·기패관(旗牌官)·중군병방(中軍兵房) 각 2인, 오기차지(五旗次知) 1인, 교훈도(敎訓導)·별고감관(別庫監官) 각 1인, 사료군(射料軍) 10인, 서기(書記) 2인, 고직(庫直) 3인, 책장무(冊掌務)·판장무(板掌務) 각 1인, 취수(吹手) 2인, 각사승장(各寺僧將) 11인, 수승(首僧) 11인, 의승(義僧) 350인 등으로 편제되었다.

승군대장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하고 있었는데, 초대 승군대장에는 성능이 임명되었다. 치영의 승군들은 낮에는 무술을 익히고 아침·저녁으로는 불경을 공부하면서 나라의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산성 안에 많은 절을 창건하여 승군의 병영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당시 병영으로 이용되었던 사찰로는 도총섭이 장무(掌務)하였던 136칸의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하여 태고사(太古寺)·서암사(西巖寺)·용암사(龍巖寺)·보국사(輔國寺)·보광사(普光寺)·부왕사(扶旺寺)·원각사(元覺寺)·국녕사(國寧寺)·노적사(露積寺)·경흥사(慶興寺) 등 11개 사찰과 원효암(元曉庵)·봉성암(奉聖庵) 등 2개 암자가 있었다.

이 중 중흥사만은 중창한 것이고 나머지 사찰은 승군의 주둔을 위하여 축성할 때 새로 창건한 것이다.

변천과 현황

1714년(숙종 40)에 남한치영과 북한치영의 의승군 정원을 책정하고 연 6차의 방번제(防番制)를 시행하였는데, 북한산성의 방번승(防番僧)은 351인이었다.

1756년(영조 32)에는 방번제로 인한 지방 각 사원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이 제도를 개혁, 방번전(防番錢) 징수제도로 바꾸었다. 북한치영은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북한산지(北漢山誌)』
『경성부사(京城府史)』
『비변사등록』
「조선후기산성의 승군총섭」(여은경, 『대구사학』 32, 1987)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우정상,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5)
「정조대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전의 반감」(김갑주, 『소헌남도영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4)
「숙종조북한축성고」(김용국, 『향토서울』 8, 1960)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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