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순응과 이정이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되었다. 의상의 화엄 10찰 중의 하나이고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의상의 법손 순응이 화엄사상을 펴고자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사찰의 이름을 따왔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팔만대장경을 이곳에 옮김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의 요람이 되었다.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한 장경각은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건물로 평가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장경판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0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의상(義湘)의 화엄10찰(華嚴十刹)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佛事)를 도와 전지(田地) 2,500결(結)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法孫)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創寺)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福田)이었던 희랑(希朗)이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寺刊藏經) 중에 화엄 관련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寺宇)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뒤 세조는 장경각(藏經閣)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仁粹王妃)와 인혜왕비(仁惠王妃)가 학조(學祖)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寮舍: 사찰의 승려들이 사는 집)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에 화재로 여러 요사와 만월당(滿月堂) · 원음루(圓音樓)가 불탔으며,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無說殿)이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또 화재로 인해 큰 축대 아래 수백 칸이 불타 버렸지만,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의 도움으로 능운(凌雲)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수로 불이 났으나 관찰사 김상철(金尙喆)의 협조로 설파(雪坡)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惺坡)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천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金露敬)의 도움으로 영월(影月) · 연월(淵月)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법성료(法性寮)가 다시 불에 탔다. 이와 같이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敎宗) 18개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元興寺)를 전국의 수사찰(首寺刹)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中法山)을 두었을 때는 영남 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0본산(本山)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현재는 말사 172개와 부속 암자 16개를 거느리고 있는 법보종찰이며, 선원(禪院) · 강원(講院) · 율원(律院) 등을 갖춘 총림(叢林)으로서 한국불교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 · 극락전 · 관음전 · 응진전 · 조사전 · 퇴설당(堆雪堂) · 청화당(淸和堂) · 궁현당(窮玄堂) · 구광루(九光樓) · 경학원(經學院) · 선원 · 우화당 · 보경당 · 적묵당 · 선열당 · 사운당(四雲堂) · 독성각 · 해탈문 · 봉황문(鳳皇門) · 일주문(一柱門) 등이 있다.
이 절에 소장된 중요 문화유산으로는 대장경판(국보, 1962년 지정)과 장경판전(국보, 1962년 지정),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13](국보, 1991년 지정),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74(국보, 1993년 지정),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국보, 1982년 지정. 보물, 1982년 지정),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 원당암(願堂庵)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1970년 지정),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보물, 1963년 지정),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국보, 2020년 지정), 해인사 영산회상도(보물, 1997년 지정), 사간장경 중의 보물 다수 등이 있다.
①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중심 법당으로, 1985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창건 이후 건물의 자세한 내력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현 건물은 1817년(순조 17) 제월(霽月)과 성안(聖岸)이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 봉안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은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삼존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으로 불린다.
본래 성주군 금당사(金塘寺)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이 절이 폐사될 때에 용기사(龍起寺)로 옮겨졌다가 1897년 범운(梵雲)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봉안되었으며, 원래부터 있던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 지장보살 · 보현보살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1996년 9월에는 비로자나불상 등에서 1326년(충숙왕 1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의복, 지공(指空)의 「문수최상승무생계법」계첩(戒帖)을 비롯한 여러 유물과 불단 진단구(鎭壇具)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2점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② 장경각
장경각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기본 정신을 대변해 주는 건물이다.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해 둔 2개의 판전으로서, 경판의 보관을 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걸작으로 인정받는 건물이다. 이 장경각은 1995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안에 소장된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고려대장경판의 영인본은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된 전산화 작업을 통해 디지털화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③ 기타 전각
명부전은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목조지장보살 및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19평으로 1873년(고종 10)에 담화대사(曇華大師)가 옛 금탑전(金塔殿) 자리에 신축하고, 경상남도 웅천(熊川)의 성흥사(聖興寺)에서 옮겨온 시왕상을 봉안하였다. 지금 건물은 1873년(고종 10)에 지어졌다.
현재 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극락전은 독립된 산내 암자로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1965년에 자운스님께서 화주가 되어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여 지금의 선원 자리에 중수하였고, 그 뒤에 다시 1973년에 봉주화상이 주지로 있을 때 대장경판전을 신축하기 위하여 건물을 지금의 자리인 100자 아래 지점에 새로이 옮겨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율원으로 쓰이는 한편 한주 스님들의 거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관음전(觀音殿)은 심검당(尋劍堂)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3동 80칸으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현재 건물은 1908년 회광(晦光)이 천상궁(千尙宮)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현재 강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 100여 명의 스님들이 경전을 연마하고 있다.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는 응진전은 1488년(성종 19) 학조대사가 창건하여 역대선사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현재 건물은 1817년 성안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처음에는 역대 선사의 영정만을 봉안했는데, 소조(塑造) 석가여래와 1918년에 판전 서재(西齋)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명 조사전이라고도 불리는 해행당(解行堂)은 1817년에 제월선사가 퇴설당을 중창할 때 함께 중창하고 수선사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처음에는 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이회광이 주지로 있을 때 선객들이 드세다 하여 수선사를 폐하고 조사전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개산조 이하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셔 왔다.
1967년 목조 희랑조사상을 보장전(寶藏殿)으로 사용하는 구광루로 옮기고 이듬해에 해인총림을 설치하여 영정을 모두 경학원에 봉안하고서부터는 다시 상선원으로 사용해 오다가, 현재는 방장 부속실로 사용하고 있다.
퇴설당을 처음 창건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817년에 불에 모두 타 버리자 제월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시 1965년에 근담화상이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퇴설당은 최근까지 상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1899년에 경허 대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동수정혜결사를 실천한 장소였던 점에서 역사적인 수행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서의 의미가 깊다. 선원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됨에 따라 현재는 총림 방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궁현당의 창건년도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쳐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완전 복원된 건물로서 해인사 승가대학(강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고 있다. 선불장(選佛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구광루는 1818년 감사(監司) 김이재(金履載)의 주선으로 건립되었다. 크기는 67평으로 본래는 재식시(齋式時) 법요(法要)를 집행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사중의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쪽 한칸은 종고루(鐘鼓樓)로 사용되고 있다.
경학원은 경홍전(景洪殿)이라고도 하며 크기는 34칸이다. 1892년 민형탁(閔炯托)의 뜻에 의하여 범운화상이 건립하였다. 본디 왕, 왕후, 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삼전위축소(三殿爲祝所)로 건립되었다. 그 뒤에 1946년에 이르러 환경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손수 경학원이라고 글씨를 써서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고, 1968년에 지월화상이 중수하여 이듬해부터는 해행당에 봉안되어 있던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옮겨 모셨다가, 1975년부터 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선열당은 종래에 하선원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노전실과 부방장실과 영정 안치실로 쓰이고 있다. 특별히 노전실은 응향각이라고도 하는데 응향각은 향을 사른다는 뜻이고 노전은 의식을 집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운당의 크기는 146평으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490년 설호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몇 차례 중수되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84년에 중수된 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임자들의 방사(房舍)로 사용되고 있다.
해탈문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1817년 중건하였고, 1899년 범운대사가, 1940년 사중에서 중수하였다. 봉황문은 1817년 건립하였으며, 사천왕탱(四天王幀)이 안치되어 있다. 일주문은 1940년에 건립되었다.
④ 기타 문화유산
이 밖에 해인사의 성보(聖寶)로는 합천 해인사 길상탑(보물, 1996년 지정), 해인사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보물, 2000년 지정), 해인사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해인사 동종(보물, 1997년 지정)과 같은 지정유산과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 금은자사경(金銀字寫經) · 세조영정(世祖影幀) 등이 있다.
또 상탑향로(象塔香爐) · 무공수정(無孔水晶) · 옥등잔(玉燈盞) · 진주등(眞珠燈) · 순은화병(純銀花甁) · 관욕소관(灌浴哨罐) · 오동향로(烏銅香爐) · 순은다기(純銀茶器) · 순은향로(純銀香爐) · 순은방향로(純銀方香爐) · 향로개(香爐蓋) · 요령(搖鈴) · 감로병(甘露甁) · 일영의(日影儀) · 봉촉대(鳳燭臺) · 귀형촉대(龜形燭臺) · 관복(官服) · 오조어필첩(五朝御筆帖) · 법라(法螺) · 옥제조화(玉製造花) ·
금강저(金剛杵) · 각사인(各寺印) · 헌종어필(憲宗御筆) · 삼보인(三寶印) · 계첩석판(戒牒石版) · 팔상병(八相屛) · 33조사영병(祖師影屛) · 복수수병(福壽繡屛) · 숙종어필(肅宗御筆) · 화초수병(花草繡屛) · 화조오채병(花鳥五彩屛) · 흑판복수병(黑板福壽屛) · 복수채병(福壽彩屛) · 대화로(大火爐) · 금산첩(禁山牒) · 방울 · 대종(大鐘) · 소종(小鐘) · 경허(鏡虛)친필 · 명문와(銘文瓦) · 향합(香盒) 등이 있다.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던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는 사명대사(四溟大師) · 선수(善修) · 희언(熙彦) · 각성(覺性) 등이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맥을 따질 때,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 · 희랑 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의천(義天) · 경남(敬南)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학조 · 체정(體淨) · 유기(有璣) · 유일(有一) · 상언(尙彦) · 유안(油安) · 성여(性如) 등 유명한 승려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또한, 역대 명인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다른 사찰들에 비하여 두드러진 점이다.
말년에 가야산에 들어와 생애를 마친 최치원(崔致遠)이라든가 대장경 조성에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긴 이거인(李居仁),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홍길동으로 알려져 있는 정인홍(鄭仁弘) 등은 모두 이 절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산내 암자 중 유서가 깊거나 규모가 큰 것은 신라왕실의 원찰(願刹)로 전해지는 원당암(願堂庵)을 비롯하여, 고불암(古佛庵) · 고운암(孤雲庵) · 금강암(金剛庵) · 길상암(吉祥庵) · 백련암(白蓮庵) · 보현암(普賢庵) · 지족암(知足庵) · 희랑대(希朗臺) · 국일암(國一庵) · 약수암(藥水庵) · 용탑암(龍塔庵) · 삼선암(三仙庵) · 금선암(金仙庵) · 청량사(淸凉寺) · 홍제암(弘濟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