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추사(秋史) · 보담재(寶覃齋) · 완당(阮堂) · 예당(禮堂) · 시암(詩庵) · 노과(老果) · 노격(老鬲) ·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 원춘(元春)이다. 경주 김씨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훈척 가문 중 하나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할아버지는 김이주(金頤柱),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金魯敬)이다. 어머니는 기계 유씨(杞溪兪氏) 유준주(兪駿柱)의 딸이다. 아우는 김명희(金命喜)와 김상희(金相喜)이다. 후사가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에게 입적되었다.
20대 이전부터 박제가(朴齊家)로부터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북학을 경험하였다. 24세이던 1809년 친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수행했다. 이 사행에서 김정희는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비롯하여 당시 청의 학술을 이끌었던 학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학설을 듣고 배울 기회를 얻었다. 이들과의 학술적 인연은 귀국 후에도 이어져서 김정희의 학술 형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1830년에 김노경이 김우명(金遇明)에게 탄핵을 받아 고금도로 3년의 유배형을 받았고, 1840년에는 윤상도(尹尙道)의 옥사로 인해 김정희 본인이 제주도 대정현(大精縣)에 위리안치되기에 이르렀다. 9년 동안의 유배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1851년에는 친구 권돈인(權敦仁)의 예론에 동조했다가 유배형을 받아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보내졌다. 이듬해에 돌아와 과천에서 만년을 지내다 1856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정희는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53세경까지 거의 20년 동안 관료의 이력을 순탄하게 쌓았다. 급제한 후에 대교(待敎), 시강원 보덕(侍講院 輔德)과 같은 청요직을 받았고, 41세에는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다. 51세에는 성균관 대사성과 병조참판을 지냈고, 53세에는 형조참판에 올랐다.
그의 관료 이력 중 충청도 암행어사는 일생에 있어 중요한 기점으로 작용했다.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 비인의 현감으로 있던 김우명(金遇明)을 파직했는데, 이에 김우명이 앙심을 품었는지 1830년에 김노경을 탄핵했기 때문이다.
김정희 학술의 바탕은 금석학이었다. 20대 초반,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북학을 접한 인연으로 그는 청대 고증학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제군관으로 베이징[北京]을 방문했을 때 청의 석학들을 만나 일차적인 결실을 얻었다. 인적 네트워크가 그중 큰 성과인데, 원로 학자였던 옹방강과 완원을 필두로 하여 옹수곤(翁樹崑) · 주학년(朱鶴年) · 섭지선(葉志詵) · 유희해(劉喜海) 등과 지속적인 교류를 한 점을 말한다.
김정희는 국내 유적들을 답사하고 자료를 모아 분석하여 중국의 동료들과 공유하며 연구했다. 그 대표적인 결실이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실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두 점의 조사와 분석이다.
한편, 그의 경학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저술에서 김정희는 베이징에서 만났던 옹방강과 완원의 학설을 수용하되 자기의 경험과 사유로써 소화하여 자기화하는 데 이르렀다.
불학(佛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자로서 유가 경전과 함께 불경도 중시했다. 따라서 당대의 선승들과 깊은 교유 관계를 맺고 학술과 사유를 그들과 공유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초의선사, 백파선사와 같은 선승들이고, 이들과 논쟁하면서도 도반(道伴)의 관계를 유지했다.
김정희의 가문은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예산 본가의 원찰 화암사를 두고 있었다. 1846년에 화암사를 중건하게 되자, 제주 유배 중이었던 그가 상량문과 시경루 등의 편액 글씨를 써 주기도 했다. 사망하던 해에 봉은사 경판고 편액에 써 준 「판전」은 그가 불학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증표이면서, 만년까지 필력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걸작으로도 꼽힌다.
한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서예가 김정희의 서예는 예서가 대종을 이룬다. 어린 시절부터 서예의 각 서체를 모두 섭렵하며 배웠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가 정착하고 추구한 서체는 단연 예서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서를 천착한 것은 아니고, 초년기부터 착실하게 서법의 고전들을 학습했다. 전서의 경우, 김정희가 소전으로 쓴 사례는 없지만 소전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서체인 금문을 임서하고 발문까지 단 사례가 있어서, 그가 고문자에 관한 관심과 학습적 실천을 모두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예서 역시 고전부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데, 예산 고택에 있는 습작 중에 동한 시대 예서를 대표하는 서적인 「조전비(曹全碑)」를 연습한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해서로 쓴 「묵소거사자찬(黙笑居士自讚)」(국립중앙박물관)은 초당 삼대가의 한 명인 구양순의 서체를 바탕으로 삼고 옹방강의 서풍도 보이는 등 고금의 고전을 통섭한 결과를 보여준다.
김정희는 경학의 한 분야로서 금석을 연구했던 까닭에 글씨도 그 학문의 경향을 따랐다. 즉, 한자의 오체 가운데 예서를 선택하고 연구하되, 동한 시대 예서는 세속화하여 어여쁜 자태만 추구하는 서체로 결론짓고, 그보다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서한 시대 예서를 주목하였다. 동한 시대 예서는 비문의 탁본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서한 예서는 동경(銅鏡)이나 등잔의 관지, 벽돌의 명문 등을 자료로 삼아 연구했다. 그 결과 고대의 전서에 가까운 초기 예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제주 유배기를 거치면서 김정희의 자가풍을 잘 보여주는 추사체는 통속적 서예관과 대중의 심미안을 깨뜨린, 파격의 미학이 근간을 이루는 개인 서체라고 할 수 있다. 김정희는 당송 시대부터 자기와 같은 시대인 청대까지 서예의 역대 명가의 필법을 분석하고 장단점을 파악하여 통속적 안목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낯섦'을 창출했다.
이 낯섦을 김정희는 스스로 '괴(怪)'라고 규정했는데, 이를 손쉽게 '이상하다'고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가 말한 '괴'는 대중과 통속에서 우뚝 솟은 탈속의 경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에, 대중의 이해나 애호를 바라지 않는 일취(逸趣)를 말하기 때문이다. 김정희가 말한 '괴'의 의미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관지 가운데 하나다. "초예와 기자의 법으로 이 그림을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는가?[以草隷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라는 언술이 그것이다. 이는 그림에 쓴 관지의 하나지만, 추사체의 근간을 설명할 수 있는 언술이라고도 할 수 있으므로 매우 요긴하다.
임창순은 추사체의 연원에 '불운함'을 두기도 했다. 그가 중년기 이후에 겪은 기구한 사연들이 일차적으로는 원망과 울분으로 표출되었겠지만, 단계를 올라서게 되면 세상에 대한 관대함을 얻고, 초탈한 다음에 해학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추사체가 그러하다는 설명이 있다. 이 설명도 추사체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적인 서예 작품인 「호고연경(好古硏經)」[대련, 간송미술관 소장]을 비롯한 여러 걸작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걸작도 있는데, 윤정현(尹定鉉)에게 써 준 「침계(梣溪)」[간송미술관 소장]는 김정희의 학자적 양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친구 윤정현의 호를 예서로 써주겠다고 약속한 후 예서의 용례에서 ‘침’ 자를 찾다 30년을 넘기게 되었다는 사연은 글자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던 그의 양심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관지에서는 그의 학자적 양심과 함께 북조 글씨들을 살피다가 그 원리를 깨치고 마침내 침 자를 쓰게 됐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또한 그의 학구열과 그것의 올바른 방향성이 보여줄 수 있는 사례로서 매우 중요하다.
인장을 새기는 전각에 대해서도 김정희의 관심은 높았다. 그는 청에서 활동하던 전각가들과 교류하면서 인보를 구해 연구하여 졸박한 각법이 남다른 각풍을 형성하는 데 이르렀다.
김정희는 자신을 화가로 여긴 적은 없으나, 그는 한국 회화사에 기념비적인 회화 작품 「세한도(歲寒圖)」를 남겼다. 「세한도」 이전에도 그는 종종 산수화 등을 그리면서 그림에 관한 관심을 보였다. 1810년대에 제작한 그림들은 화보를 참고하여 그린 사례들로,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조선의 화가들이 제작한 산수화와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베이징에 다녀온 후, 그곳에서 만난 인사들에게 선물로 산수화를 증정하기도 했는데, 대개 경물이 생략되고 깔끔함을 추구하는 선비의 기상을 보이는, 소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를 '황한소경도류(荒寒小景圖類)'라고 한다. 이 같은 그림은 1844년 작품 「세한도」로 이어진다.
「세한도」는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준 그림으로, 고단한 자아가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느낀 감동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걸작이다. 앞서 언급한 황한소경류 산수화를 추상적인 단계로 끌어올린 듯한, 극단적인 생략이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다. 변하지 않는 인간상을 말한 공자의 언술에서 제목을 삼고, 화면의 내용에서는 신세의 성쇠에 따라 오가는 인심을 언급하며 고마운 사람 이상적을 높였다.
따라서 「세한도」는 고전적인 인간상을 찬양한다고 할 수 있는데, 김정희는 제목과 관지, 그리고 손수 짓고 쓴 「세한도 기문」의 서체로도 자신의 코드를 전하려 했다. 즉, 제목은 한대 예서로, 관지는 위진 시대의 초기 해서로 쓰고, 「세한도 기문」은 괘선을 긋고 북조 시대 해서의 풍을 가미하여 낱낱의 글자를 매우 정성껏 썼다.
묵란도는 김정희의 회화를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화목이다. 그는 중국 양주화파의 화가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정섭(鄭燮)을 매우 좋아하고 존경하기도 했는데, 1834년경에 그린 난초 그림을 모아 엮은 『난맹첩(蘭盟帖)』에 양주화파의 화풍이 보인다. 묵란도의 백미는 북청 유배를 마치고 과천으로 돌아와 지낼 때 그린 「불이선란도」다. 『유마경』에 나오는 한 장면을 따와 그림의 모티프로 제시한 점은 그가 만년에 불학에 깊이 들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며, 명 말의 동기창(董其昌)이 언급했던 화론을 응용하여 자신이 추구한 고법이 결코 대중에게 쉽게 전해지지 않으리라는 쓸쓸한 자탄과 함께 그림을 주려고 했던 이와 실제로 차지한 이가 달라진 아이러니를 바라보는 해학도 담았다.
김정희의 학술과 예술은 당대와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당대에는 왕실의 종친이었던 이하응(李昰應), 친구이자 문인 관료였던 권돈인, 친아우인 김명희를 비롯하여, 여항 예술가였던 조희룡(趙熙龍), 허련(許鍊), 전기(田琦) 등의 인사들을 포함하는 문파를 이루었다.
훗날에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묵란화의 대가가 되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조희룡은 끝내 김정희의 예술론에 동화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선택했으나 근본적인 영향을 부정할 수 없었다. 허련은 김정희의 제자로서 지위를 얻어서 진도에서 새 화파를 열었고, 전기는 독특한 개성의 회화 세계를 펼치려 했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현재에도 김정희의 서법을 따르고 그 이치를 깨닫기 위하여 애쓰는 예술가들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