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海印寺) 창건주이다. 일찍이 출가하여 신림(神琳)의 지도를 받다가 766년(혜공왕 2)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고승(高僧)들로부터 불경을 배우고 선(禪)을 닦았다.
그 뒤 보지공(寶誌公) 제자를 만나 보지공의 유언에 따라 『답산기(踏山記)』를 얻은 뒤 보지공의 묘소를 찾아가서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어 법(法)을 구하였다.
그 때 묘문(墓門)이 열리고 보지공이 나와 설법하고 의발(衣鉢)과 신발을 전해주면서 우두산(牛頭山) 서쪽 기슭에 대가람 해인사를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귀국한 뒤 가야산으로 들어가 사냥꾼의 인도로 현재의 해인사 자리에 초암(草庵)을 짓고 선정에 들었다. 그 때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났는데 어떤 약도 효력이 없었으므로 왕은 사신들을 보내어서 고승들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가야산으로 간 사신은 선정에 들어 방광(放光)하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왕궁으로 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왕후의 병난 사연을 들은 그는 오색실을 주면서 실의 한쪽 끝을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쪽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나을 것이라 하였다.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배나무는 말라 죽고 병은 나았으므로 왕이 고맙게 생각하여 그의 원을 따라 802년(애장왕 3) 해인사를 지을 때 인부를 동원하여 일을 도왔다. 그 뒤 해인사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정(利貞)이 그의 뒤를 이었다.
생애가 다분히 전설적이지만, 그가 중국 유학승이라는 점과 해인사를 창건했다는 것, 의상(義湘)-신림-순응으로 이어지는 화엄종의 승려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