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원사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에 있었던 백제시대의 절이다. 통일신라시대 체징이 구족계를 받은 사찰이며, 의상의 화엄십찰 중 하나였다. 고려시대에 탄문의 하산소로 지정되면서 사세가 확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강당사라고도 불렸으며, 18세기에는 폐사된 상태였다. 관련 문화유산으로 서산 보원사지 석조와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원사(普願寺)의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부터 기록을 찾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 이후의 유물이 다수 남아 있다. 1968년 보원사 터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 등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토대로,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전라남도 장흥군 보림사(寶林寺)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의 비문에 따르면, 체징이 827년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였으므로 9세기 초에 보원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보원사는 의상(義湘: 625~702)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면, 보원사 또는 보원사의 기원이 되는 사원이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존재하였으며, 통일신라 때 사세가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려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 900975)의 하산소(下山所)로 지정되면서 위상이 높아졌다. 탄문은 장의산사(藏義山寺)의 신엄(信嚴)에게 화엄경(華嚴經)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는데, 그 계행이 매우 높아 고려 태조가 별화상(別和尙)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이후 태조와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대를 거치면서 왕실과 두터운 인연을 맺었다. 혜종과 정종은 그를 지극히 공경하였고, 광종은 그를 왕사(王師)로 봉하여 귀법사(歸法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탄문이 975년 국사(國師)로 책봉된 후 이곳이 하산소가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보원사의 사세가 매우 컸음을 보여 준다. 고려 정종 때[재위 13041046] 아들 4인을 둔 자가 아들 1인을 출가시킬 경우 영통사와 숭법사, 동화사 및 보원사에 출가시키도록 한 것으로 보아, 국가에서 보원사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불우(佛宇) 조에 간략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때까지도 이 절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초반의 『호산록(湖山錄)』에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도 불린다는 기록이 있어 그 존재가 확인된다.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8세기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절터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1987년 7월 18일에 사적 주1로 지정되었다. 용현계곡을 따라 하천이 흐르는데, 이 하천을 중심으로 가람이 조성되었다. 서쪽 편이 가람의 중심 영역이고, 동쪽 편이 진입부였다고 추정된다. 현재 절터에는 10세기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 보원사지 석조(瑞山 普願寺址 石槽)[^2]를 비롯해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瑞山 普願寺址 幢竿支柱)[^3],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4],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5],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6] 등의 유물과 초석이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 금동여래입상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원사지 철제여래좌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