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회화
단체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에 있는 국립박물관.
정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에 있는 국립박물관.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의 박물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적인 국립박물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08년 9월에 발족한 창경궁 내의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출발하였다. 이왕가박물관은 왕실의 재정적 뒷받침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1909년 11월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 내에 박물관 건물을 신축하고 1915년 12월 총독부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일부 구입품 외에 고적 조사를 통해 습득한 매장 문화재, 그리고 사찰의 기탁품 등 역사·고고 미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전시하였다.

한편, 1915년부터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신라시대의 유물을 전시해 오던 경주의 전시관이 1926년에는 총독부박물관의 경주분관으로 편입되었다. 부여와 공주에서도 고적보존회가 이끌어 오던 유물전시관들이 1939년과 1940년에 각기 총독부박물관의 분관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광복 전까지 총독부박물관 산하에 모두 3개소의 분관이 설치, 운영되었다.

일본인들에 의해서 독점되었던 박물관도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같은 해 9월에 인수받아 국립박물관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3개의 지방 분관도 국립박물관 분관으로 운영되었다. 1946년에는 개성부립박물관이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으로 편입되는 등 국립박물관의 기능이 점차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6·25전쟁으로 인해 박물관이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이 기간 중 북한에 의한 문화재의 북송은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물이 보관된 경복궁 전각이 일부 폭격을 받아 수천 점에 이르는 유물이 소실되었다. 9·28 서울 수복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다시 불리해지자 서둘러 유물 대피에 착수하여, 중요 문화재 2만여 점을 부산으로 긴급 피난시켰으며 그곳에 임시 사무실을 설치하였다.

서울 환도와 함께 남산에 있던 민족박물관 자리에 박물관 임시 본부를 설치하였다가 다시 덕수궁 석조전을 수리하고 이전함으로써 박물관은 한동안 마비되었던 기능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69년에는 문화재관리국에 소속되어 있던 덕수궁미술관이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어 두 개의 전시 시설이 일원화되면서 대폭적인 소장품의 확충이 이루어졌다. 1971년 부여박물관이 신축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국립박물관의 시설이 크게 확충된 기간이었다. 1972년 8월에는 서울의 국립박물관이 경복궁 내에 현대식 설비를 갖춘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면서 명칭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고쳐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게 되었다.

한편, 공주에서는 1971년에 발굴 조사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엄청난 유물의 전시를 위한 새로운 박물관의 신축 문제가 절실해졌다. 이에 따라 1973년 10월 공주박물관을 신축, 개관하였다. 경주 지역에서도 1973년부터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실시된 미추왕릉지구발굴에서 출토된 유물 등 새로운 문화재를 전시하기 위하여, 1975년에 새로이 경주박물관을 신축, 개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79년에는 신안 해저에서 발견된 중국 원나라의 난파선으로부터 인양된 방대한 양의 도자기 등 중국 유물을 보관, 전시하기 위하여, 새로이 광주박물관이 개관되면서 호남 문화의 연구와 전시의 중추적 구실을 맡게 되었다. 같은 해에 지금까지 문화재관리국 소속으로 남아 있던 한국민속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1984년에는 우리나라 고대사의 새로운 조명을 위한 가야 문화에 대한 연구가 각광을 받으면서 이에 부응하기 위하여 새로이 진주박물관이 개관되었다. 또한 1987년에는 중원 지방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 지역의 문화재 전시와 그 연구를 위하여 청주박물관이 새로이 문을 열었다.

중앙박물관은 국민과 정부의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의 증진과 민족 문화 정립의 시급함을 인식하고, 또한 그 사이 늘어난 유물의 분량과 함께 지금까지의 체제로부터의 탈피가 절실하던 때에 마침 정부 청사의 이전 계획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구 중앙청사로의 박물관 이전 문제가 제기되었다. 구 중앙청사를 대폭 개수하여 1986년 8월 21일 새 청사로 이전, 개관하여 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에 의해 잃어버렸던 우리의 역사를 되찾고 짓밟힌 민족정기와 파괴·훼손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복원하여야 한다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역사적 결단을 내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바로 옆 사회교육관 건물을 증·개축하여 1996년 12월 13일 이전, 개관하였다.

그리고 21세기 통일 한국과 세계화·문화의 시대를 대비하고 5,000년 문화 민족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열기 위해 2005년 10월 28일 용산 가족 공원 내 1만 6,000여 평의 대지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신축하여 개관하였다.

기능과 역할

소장 유물은 우리나라의 역사·고고학·미술·민속 등에 관한 자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도 일제강점기에 평양 지방에서 발굴, 수습된 낙랑 유물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수집된 서역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최근에는 신안 해저에서 인양된 방대한 양의 원나라 중국 유물을 확보하게 되었다.

유물의 전시는 우리나라의 고고학·미술사·역사 전반을 통한 우리 문화 발전의 큰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국내 전시 외에도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해외에 고양시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해외 전시가 이루어졌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 전시와 유럽 전시가 있었다. 1976년부터 1984년까지는 일본과 미국 및 유럽 등지에서 대규모의 ‘한국미술5천년’ 전시가 있었다. 1992년에는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가야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대규모 ‘가야문화전’이 기획되어 일본의 도쿄[東京]·오사카[大阪]·후쿠오카[福岡] 등 3개 박물관을 순회 전시하는 등 특별전과 장기 대여 전시 등으로 우리나라 문화의 특성을 해외에 널리 소개하는 데 한몫을 담당하였다.

전시 이외에도 유적에 대한 계획적 발굴 조사와 지역 사찰, 개인 소장 문화재에 대한 연차적인 실물 자료 조사와 지표 조사 등 학술 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조사 보고서로 간행하고 있다. 광복 직후인 1946년에 실시한 경주 호우총(壺玗塚) 발굴 조사는 한국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최초의 발굴 조사였다. 그 뒤 1960년대에는 7년 여에 걸쳐 진행된 전국의 지석묘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져 그 결과가 『한국지석묘연구』라는 방대한 보고서로 간행되었다. 또한 동삼동·고성·시도패총과 서울 암사동 유적에 대한 조사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75년부터 실시한 부여 송국리와 1980∼1984년까지 모두 5차에 걸쳐 조사된 춘천 중도 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걸친 생활 문화의 실상을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 밖에도 의성탑리, 경주의 서악리 그리고 울릉도 등의 고분 조사와 함께 감은사지·금강사지 등 절터의 발굴은 우리나라 역사 고고학의 새로운 업적으로 평가된다.

1964년부터 1977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9차에 걸쳐 실시된 강진 대구면 청자 요지에 대한 발굴 또한 도자기 역사의 규명에 중요한 뜻을 지닌 방대한 사업으로써 미술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1980년과 1982년에는 청자의 발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강진군의 용운리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최근 보고서로 간행되어 청자 연구의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 각 지역 박물관에서도 연차적인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해마다 계획·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밖에 현지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공사에 따른 구제 발굴에 참여하고 있다.

전시·조사 기능 외에 사회 교육 또한 박물관의 주요 기능 중의 하나이다. 박물관특설강좌를 비롯한 어린이·청소년·주부·노인·교사 강좌와 전통염색교실, 도자기교실 등 각종 사회 교육 강좌를 운영하여 전통 문화의 올바른 실체를 통한, 민족의 실체에 대한 인식에 튼튼한 초석을 마련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편, 2005)
국립중앙박물관(www.museum.go.kr)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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