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정광대다라니경 ()

불교
문헌
8세기 초, 간행된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
문헌/고서
편찬 시기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간행 시기
8세기
판본
목판본
소장처
불교중앙박물관
내용 요약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8세기 초에 간행된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이다. 이 경은 1966년 10월 13일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였을 때, 제2층 탑신부에 봉안되어 있던 금동제 사리외함(舍利外函)에서 다른 여러 사리 장엄구(舍利莊嚴具)와 함께 발견된 것이다.

정의
8세기 초, 간행된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
서지 사항

이 판본은 너비 65∼67mm의 책지 12장을 이어 붙인 것인데 좀이 슨 상태이다. 총 길이는 약 620㎝였으나 구겨진 부분을 펴고 부스러진 조각을 찾아 복원한 결과 그 길이가 642㎝로 늘어났다. 위 · 아래 변의 길이는 53∼55mm이고, 그 사이 각 항의 글자 수는 6∼9자이며, 직경 약 4㎝의 붉은 나무 기둥에 말아 놓은 작은 두루마리 책이다.

처음 공개될 당시의 상태는 비로 인한 습기 때문에 썩은 부분이 많고 벌레 먹은 부분이 많았으며, 심한 산화 작용으로 부스러지고 조각이 나서 책머리의 경 이름 · 한역자 이름과 본문 11항을 완전히 잃었다. 또한 본문의 약 250㎝까지는 5∼6㎝ 간격으로 1∼2항 전후에 걸친 글자를 잃었으며, 그 이하로도 문자의 훼손이 계속되다가 권말에 이르러서야 그 모습이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이를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을 위촉받고 특별 관리해 왔으나 20여 년이 지난 무렵에는 아예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후 문화재위원회에서 1988년 9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5개월간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하였다. 그 결과 원형의 면모를 되찾고 떨어진 조각을 맞추어 잃어버린 본문 11항 중 4∼10항의 일부를 되찾았다.

구성과 내용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도화라국(都貨邏國)의 승려 미타산(彌陀山)이 주6과 함께 당나라 무주(武周) 말년인 장안 연간(長安年間, 701∼704)에 한역했다. 이 경에서는 망자에 대한 추복(追福)과 주2,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부르는 것, 병의 치료, 장수 등 다양한 공덕을 설하고, 공덕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오래된 탑을 중수, 다라니의 서사와 소탑 제작과 같은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초 황복사 탑을 이 경의 내용에 따라 조성한 이후 이 경에 영향을 받아 석탑을 조성하는 예가 다수 나타난다.

편찬/발간 경위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간기(刊記)가 없어 정확한 간행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학계에서는 이 경이 봉안된 석가탑이 751년(신라 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불국사가 대규모의 가람으로 중창될 때 세워졌고, 그 탑 속에서 나온 주요 사리 장엄구들이 신라시대의 조형 양식과 특징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그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2007년에 이 경과 함께 발견되었던 묵서지편(墨書紙片)이 모두 판독되면서 이 경은 조금 더 일찍 간행된 것이 밝혀졌다.

묵서지편은 1024년(현종 15)에 쓰인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无垢淨光塔重修記)와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형지기(佛國寺无垢淨光塔重修形止記), 그리고 1038년(정종 4)에 쓰인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와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추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追記) 등 총 4개의 문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이 경에 대한 언급은 1024년에 쓰인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와 1038년에 쓰인 서석탑중수형지기에 나온다.

1024년에 중수된 무구정광탑은 탑이 만들어질 당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넣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탑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이며 중수기에는 이 탑이 742년(천보(天寶) 1)에 조성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석탑은 다보탑보다 서쪽에 있으므로 석가탑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가 석가탑 안에서 발견되었으나 무구정광탑은 석가탑이 아닌 다보탑에서 발견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중수기에서 탑의 해체를 기술한 부분을 보면 ‘대롱 모양의 기둥과 꽃술 모양의 기둥, 연꽃 모양의 통주(筒柱)’가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다보탑의 형상과 일치하는 것이며, 일제시대 때(1925년) 해체된 다보탑에서 반출된 오구라 컬렉션(도쿄박물관 소장)의 금동 원통형 사리함 등이 ‘무구정광탑중수기’의 기록과 동일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무구정광탑을 다보탑으로, 서석탑을 석가탑으로 상정하면 두 중수기의 기록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에서 원래 탑에 있던 사리를 담는 용기(사리 장엄구)와 그 내용물을 언급한 부분에서 두 종류의 ‘다라니경’이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1038년 중수기의 같은 부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원래 다보탑에는 ‘다라니경’이 있었지만, 석가탑에는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1024년에는 지진으로 다보탑을 수리했고, 1036년 잇단 지진으로 탑이 붕괴 위험에 놓이자 1038년에 두 탑을 모두 수리했다. 이때 다보탑에 있던 『다라니경』 2종 중 1권을 빼내 새로 석가탑에 집어넣은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다보탑 창건 당시인 신라 때의 것이 맞다. 더욱이 1038년 고려에서는 탑에 봉안하는 경전이 『보협인다라니경』으로 바뀌었을 때이므로 중수 당시 새로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소형 목판본을 간행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석가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은 신라 때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42년 이전에 간행된 것이다.

이밖에 이 경이 신라시대에 인쇄된 것이라는 몇 가지 증거가 더 있다. 첫째, 서체가 통일신라시대에 등장했던 것이라는 점이다. 새김이 고박하면서도 정교하여 어느 글자를 막론하고 모나고 굳센 필의에 원필이 격조 있게 곁들여지면서도 육조체(六朝體)의 고풍을 은은히 풍겨 주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둘째, 책지의 지질(紙質)이 신라의 전통 한지주3이다. 셋째, 당나라 주4 집권기인 690∼704년에만 쓰였던 무주제자(武周制字)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중국 학자 가운데는 이 경이 당나라에서 입수하여 봉안한 당본(唐本)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지만, 이것은 책지의 지질, 글자체의 서법(書法), 무주제자의 검출에 대한 면밀한 실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빚어진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경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 770년경에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百萬塔陀羅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경이 발견되었고, 이 경이 신라시대 제작된 것임을 증명해 주는 중수기까지 발견됨으로써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를 살펴보면, 전문을 완전하게 다 새긴 목판 인쇄물이 아니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중에서 근본(根本) · 자심인(自心印) · 상륜(相輪) · 육도(六度)의 다라니 4종만을 발췌하여 장단(長短) 2종으로 나누어 조그마한 나뭇조각에 새겨 도장 또는 스탬프를 찍듯이 날인한 낱장의 인쇄물임이 밝혀졌다.

반면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경문 전부를 완전하게 새겨 글자 면을 위쪽으로 하여 먹칠한 다음, 종이를 놓고 주5과 같은 것으로 문질러 찍어내어 두루마리 형식으로 장정한 책이다. 또 판각술에서도 훨씬 정교하며 글자체가 주7 힘이 약동한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목판 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완전하게 갖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목판 축장본이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불국사석가탑내발견유물조사보고서』(문화재관리국, 1966)
박상국, 『세계최고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해설』(동국대학교, 1986)
정영호·진홍섭·황수영, 『불국사삼층석탑사리구와 문무대왕해중릉』(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국립중앙박물관, 『(불국사 석가탑 유물) 중수문서』 2(대한불교조계종, 2009)

논문

김성수, 「석가탑 묵서지편의 판독과 관련한 [무구정광경]의 간행년대에 관한 연구」(『서지학연구』 41, 한국서지학회, 2008)
박상국, 「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墨書紙片」(『佛國寺 釋迦塔 墨書紙片의 기초적 검토』, 불교문화재연구소, 2008)
신용철, 「신라 불탑에 있어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영향」(『불교학연구』 23, 불교학연구회, 2009)
이홍직, 「경주불국사석가탑발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백산학보』 4, 백산학회, 1968)
최연식,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의 재구성을 통한 불국사 석탑 중수 관련 내용의 재검토」(『진단학보』 15, 진단학회, 2008)
潘吉星, 「印刷術的起源地: 中國還是韓國」(『中國文物報』11, 1996)
長澤規矩也, 『和漢書の印刷とその歷史』(吉川弘文館, 1956)

인터넷

국립중앙박물관(www.museum.go.kr)
주석
주1

옛스러우면서도 투박함.

주2

죽어서 극락에 다시 태어남. 우리말샘

주3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 우리말샘

주4

중국 당나라 고종의 황후(624?~705). 성은 무(武). 이름은 조(曌).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제(女帝)로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쥐고, 두 아들을 차례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며,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성신 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우리말샘

주5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 우리말샘

주6

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643~712). 속성은 강(康). 호는 현수(賢首). 화엄종의 제3조로, 지엄에게서 화엄경을 배웠다. 670년에 칙령에 의하여 출가한 뒤 교학의 대성에 힘썼으며 현장, 일조, 실우난타 등의 역경(譯經)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저서에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7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옥나영(숙명여자대학교 강사, 한국고대사(불교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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