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는 글자의 모양과 양식·품격 등을 이르는 서풍이다. 『설문해자』에 명기된 서체에는 예서, 초서, 진서(행서) 등이 있다. 이들 서체들은 번잡에서 간편으로, 완만에서 신속의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예서는 전서가 너무 복잡하여 고친 것이다. 초서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빠르게 쓰게 되면서 나타났다. 또 행서는 해서와 초서 사이의 서체로, 알기 쉽고 간편하여 일상생활에서 많이 쓴다. 서체는 특유한 글자체의 기세가 예술적으로 어떤 느낌을 주느냐가 중요하다. 이는 한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한글 같은 다른 문자에서도 같은 원리이다.
서법에 있어서 문자는 대상이며, 서체는 수단, 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체(字體)는 비록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만 그 정확성이 변하여서는 안 된다.
서체 또한 자의(字義)가 달라져서는 안 되나 그 체세의 미에 있어서 중요성을 지녀야 하므로, 이것이 자체와 서체가 다른 점이다. ≪설문해자≫의 서에 명기된 자체 이외 예서 · 초서 · 진서(眞書, 행서) 등의 서체가 있는데,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서는 전서에 이어서 이루어진 서체이다. 전서가 너무 복잡하여 이것을 쉽고 빠르게 고친 것으로 또 대전을 증감하였다. 정막(程邈)이 진시황 때의 사람이니 예서의 시작은 소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② 고례(古隷: 예서) · 진례(秦隷)는 대체로 같은 자체이나, 후세에 와서 명칭을 다르게 한 것이다. 이들 자체의 특징은 곧 체세를 이루지 않은 것으로 한대의 관지자체(款識字體)와 비슷하다. ③ 한례(漢隷)는 동한의 예서를 가리킨다. 이 자체가 예서 · 대례(大隷) · 진례와 다른 것은 모두 파책(波磔)의 도법(挑法)이 있는 것이다.
④ 팔분(八分)은, “팔분은 정례(程隷)의 2분(二分)과 이전(李篆)의 8분”이라는 채염(蔡琰)의 설에 의하면, 전서에 가까운 것이 된다. 장회관(張懷瓘)의 설에 의하면, 8분은 소전을 빨리 쓰는 것이며, 또 예는 8분을 빨리 쓰는 것이라 하였으니, 8분은 곧 소전에서 온 것이고 예서는 8분에서 유래한 것임을 말한다.
또, 오구연(吾丘衍)의 설은 8분은 한례의 도법이 없는 것으로 진례에 비하면 알기 쉽고, 한례에 비하면 전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들 3인의 설에서 공통되는 것은, 8분은 소전 이후 한례 이전의 자체로서, 진례 · 고례가 곧 8분이다. 다만, 소자량(蕭子良)은 왕차중(王次仲)이 예서를 꾸며서 8분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식례(飾隷)라는 것은 “예서로서 장식되었다. ”는 것이다.
이 말에 의하여 보면, 예서가 먼저이고 8분은 그 다음이 된다. 그렇다고 하면 소자량의 설은 마땅히 도법이 있는 한례에 해당하므로 앞의 3인의 설과는 상반된다. 다시 말하면, 도법이 없는 예서를 8분이라 하기도 하고, 또 이와는 반대로 도법이 있는 예서를 8분이라 하기도 한다.
⑤ 초례와 예초가 같은 하나의 예서인가, 또는 예로서 초솔(草率)한 것인가, 아니면 예서의 한 명칭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예가 모해적(模楷的)인 것이라면 이것은 초의(草意)를 띤 예서인듯하다. ⑥ 8분을 또 해(楷)라고도 하니 장회관 이전에는 그렇게 불렀다. ⑦ 예서를 또한 진서라고도 한다.
⑧ ≪당육전 唐六典≫의 주(注)를 보면, 당나라 때 예서라 하는 것은 후세의 예서를 지칭하였다. 따라서, 당나라 때의 석경(石經)이나 약간의 비갈(碑碣)이 도법인 예서로 썼고, 이것을 8분이라 하였으며, 또 일반적으로 당례라고 한다. 그리고 당나라 사람들은 전적(典籍)이나 공문은 모두 후세에 말하는 당해로 썼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여보면 예서에는 고례[秦隷] 및 분례(分隷, 한례)의 두 종류가 모두 포함된다. 고례는 전서를 빨리 쓰는 것으로 그 체는 방편(方扁)이고 파세가 없되 진나라 때 이미 있었으며, 서한에서는 이것을 통용하였다. 분례가 이에 이어 일어났는데 곧 고례가 변한 것으로, 결체(結體)는 거의 같지만 파책을 더하여 동한 때 성행하였다.
또, 예서의 명칭은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으며, 그 서체는 동한 때에 일어나 점차 변화하였다. 점(點)과 탁(啄) · 도(挑) · 적(趯) 등의 획을 더하여 분례 이후 중요한 서체가 되었다. 이 체를 당나라 때는 예서라 불렀으나, 현재는 해서 혹은 진서(眞書) 및 정서(正書)라고 일컫는다.
‘초’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일종의 고정된 자체라는 뜻이며, 또 하나는 어떠한 자체의 초략(草略)한 사법(寫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초략한 사법은 자연히 생기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기초(起草)하는 것으로, 문자를 서사(書寫)하되 시간을 줄여 빠르게 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공정(工整)함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중국 창사(長沙)의 초묘(楚墓)에서 출토된 죽간(竹簡)과 서북지방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에 나타난 자체는 대전의 초체(草體) 및 한례의 초체이다. 또, 전국시대의 동기(銅器)나 한대의 도기(陶器) 중에 쓰인 명문에서 이러한 초략된 자체를 볼 수 있다.
각 시대의 자체에는 모두 그 초체를 지니고 있어, 이들 초체자는 자연히 계속 변화하여 일종의 고정서체를 형성하게 된다. 그 가운데 장초(章草)가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초는 사유(史遊)가 만들었다고 하나, 근래에 발견된 한대의 목간 중에 선제(宣帝) 때 이미 장초의 서체가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장초의 서체는 점차로 변화한 것이지 사유가 독창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유는 다만 자연적으로 변화하여온 자체를 정리하여 하나의 자서(字書)를 엮었을 뿐이다. 예서는 전서를 빠르게 쓴 것이며 장초는 또 예서를 빠르게 쓴 것이다.
그렇지만 장초가 한례와 다른 점은 예서의 경개(梗槪)를 지니면서 예의 규구(規矩)를 줄였다는 점이다. 예의 경개란 곧 글자마다 독립되면서 결체는 모나고 납작하며, 필획은 서로 연속됨이 없고 예필의 파책을 보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예의 규구를 줄였다는 것은 분례의 점획을 생략하였다는 것으로 자체에 상당한 변화가 엿보인다. 한편, 장초가 분례에서 생겼다면, 초서는 장초에서 나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초서라고 하면 정확하게는 금초(今草)를 말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해서 중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는 위(魏)의 종유(鍾繇)의 법첩을 드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해서 또한 이미 성숙된 경지이므로, 그 이전에 해서체가 시작되어 상당한 발전을 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해서는 정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나 믿기 어렵다. 옹방강은 해서의 특징을, “예서의 파획(波畵)을 변화하여 여기에 점 · 탁 · 도 · 적을 더하였으나, 여기에는 고례의 횡(橫)과 직(直)은 남아 있다. "고 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해서는 예서와 초서가 합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행서는 해서와 초서 사이의 서체이다. 장회관은 “정서(正書)를 조금 바꾸어 쉽게 하려고 점 · 획 사이에 흘러가는 필의로 썼기 때문에 행서라 하며, 또 이것을 행압서(行押書)라고도 한다. ”고 하였다. 이 서체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하여져서 알기 쉽고 더욱 간편하여 일상생활에 가장 많이 쓰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시대의 서체의 변화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번잡에서 간편으로, 완만에서 신속으로 변화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옛 글자는 대부분 필획이 복잡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간단하여졌다.
그리고 글씨를 쓰는 데 있어서도 애초에는 ‘일필일획(一筆一劃)’으로 서로 이어지지 않아서, 결구상 비록 교차하거나 접촉되어도 필획은 모두 하나하나 독립되어 서로간에 이어지는 필세가 없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빠르게 쓰게 되면서 대필(帶筆) · 파책 등의 필세가 자연히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초서가 나타나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어느 시대의 어떤 서체로 문장을 썼다고 할 때, 그 특유한 체세가 예술적으로 어떠한 느낌을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느낌은 서체의 형태에서 오는 것이며, 그 문자가 함유하고 있는 뜻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체와 서체의 관계는 한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한글이나 일본의 가나(假名), 서양의 알파벳, 중동의 아랍문자 등 어떠한 문자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 원리인 것이다.
한글도 한자와 서법상의 문제는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세종이 제정한 훈민정음은 모두 28자의 간결한 부호이다.
이들 28자는 초성 · 중성 · 종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종성은 천(天) · 지(地) · 인(人)의 3재(三才)를 기본으로 하였고, 초성과 종성은 아(牙) · 설(舌) · 순(脣) · 치(齒) · 후(喉)의 5음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들 글자는 고전(古篆)을 본받았기 때문에 모두가 원필이며 전서의 필법을 알면 글자 쓰기가 쉽다.
≪ 훈민정음≫이 반포된 1443년 이후 원필이었던 필획이 방필로 변화됨과 함께 ‘글’ 이외의 ‘글’, 예를 들면 글 · 글 · 글 · 글 · 글 · 글 · 글 · 글 등이 ㅏ · ㅗ · ㅓ · ㅜ · ○ · ㅛ · ○ · ○로 모두 횡획(橫畵)이나 수획(竪畵)으로 변하면서 수획에는 횡획으로, 횡획에는 수획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 특색이다.
또한, “글자는 고전을 본받았다(字倣古篆). ”라 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한글의 형태는 장(長) · 방(方) · 편평(扁平)이 그 구성에 있어서 자유롭다는 것이며, 또 원과 방으로 나누어지는 필법이 성립된다는 것은 곧 모든 서법이 활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판본체(版本體)와 필사체(筆寫體)로 구분되는 한글서체는 한자의 전 · 예 · 해 · 행 · 초의 변화과정을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초기의 ≪훈민정음≫의 원필에서 < 용비어천가> · ≪ 동국정운(東國正韻)≫의 방필로의 변화과정은 한자의 전서에서 예서로 변하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세조 때에 이르면 해서의 기분이 나는 필사의 형태가 싹텄는데, 필사체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궁체의 실마리가 여기에서부터 태동된 것이었다.
국한문이 혼용되는 판본체는 모두 문자의 중심을 맞추므로 결구에 있어서도 한자와 같다. 그러나 궁체는 한글만을 쓰게 되면서 이루어진 서체이므로 줄의 오른쪽을 맞추고, 왼쪽은 들쭉날쭉하게 하여 아름다움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문자의 중심을 맞추는 한자와 섞어서 쓸 때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궁체란 본래 궁중의 여성사회에서 발달한 서사체(書寫體)로, 필획이 곱고 아름다우면서 구성면으로는 우아하고 유려하여, 한자의 해서 · 행서 · 초서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또한, 궁체는 한글만을 쓰게 되면서부터 줄의 중심에서 오른쪽을 맞춘다는 원칙이 성립되었다.
그것은 초성 · 중성 · 종성으로 이루어지는 한글은 가장 눈에 띄는 'ㅣ'를 연속하여 쓴 것인만큼 'ㅣ'를 연속하여 썼을 때, 오른쪽이 고르게 한 줄 위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ㅏ.ㅓ나 ㅑ.ㅕ의 종성에 붙는 초성이 모두 왼쪽에 있으므로 ㅏ.ㅑ의 오른쪽 점보다 왼쪽의 초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ㅏ.ㅓ.ㅑ.ㅕ 모두 수획인 'ㅣ'를 맞추어 종적(縱的)인 미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ㅡ.ㅗ.ㅛ 등에 붙는 초성이나 종성은 중성인 'ㅡ'보다 작게 아래위로 위치하게 되므로, 저절로 'ㅣ'와 연결되었을 경우 'ㅣ'의 종선보다 오른쪽으로 비껴 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오른쪽 종선을 맞추었을 때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
필사체인 궁체에 있어서도 글자모양의 길고 짧음은 비교적 자유로워서 판본체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으나, 필획의 조세(粗細)가 고르지 않은 것이 판본체와 다른 점이다. 궁체에는 정자 · 흘림 · 진흘림의 구분이 있어서 한자의 해 · 행 · 초에 해당되고, 그 변화나 특성은 모두 한자의 해서에 해당되는 정자와 같다.
또, 흘림은 행서와, 진흘림은 초서와 같다. 또, 궁체는 서간체와 등서체(謄書體)로 나누게 되는데, 앞에 든 것을 서체의 구분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구분은 형태, 즉 서풍(書風)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서간체는 다시 글월과 봉서(封書)의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글월은 간단한 문안편지로서 밖에서 궁중으로 올리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궁중에서 밖으로 보내는 것은 답글월이라 한다. 또한, 봉서도 궁중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답봉서라 하는데, 여기에는 대전(大殿)이나 중전(中殿)의 어필(御筆)이 있고, 또 나인들의 대서(代書)도 있어 다양하며, 글월보다는 장문으로서 더욱 우아하며 정중한 점이 특징이다.
한편, 판본체에서는 훈민정음 제정 당시의 제자원리(制字原理)에 부합되는 활자로 원필과 방필이 있음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으나, 점차 필사의 점과 획의 취향을 지니는 활자가 나와서 유려한 맛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것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경서의 언해본(諺解本)으로, 등서체와는 달리 행간은 물론 글자간의 간격이 일정하며 비교적 글자의 중심을 맞추려고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판본으로서 언해류가 아닌 소설류에 있어서는, 궁체의 등서체와 유사하면서 더욱 난초(亂草)로 세속화된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목판으로서 지방판들이 많은데, 각자(刻字)하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글서법은 글자의 중심을 맞추는 것과 오른쪽을 종선 위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임을 알 수 있다. 중심을 맞춘다는 것은 국한문 통용에 중요한 방법이 될 뿐 아니라, 훈민정음 자체가 고전을 모방하였으므로 본래 한글도 한자와 같이 글자의 중심을 맞추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역대의 언해자에서 모두 공통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