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에서는 내간지(內簡紙)에 사용하였다. 내서(內書)라고도 한다. 궁체는 서체 상으로는 정서(正書)와 흘림[반흘림·(진)흘림]으로 나뉘며, 양식상으로는 등서체(謄書體)와 서한체(書翰體)로 구분된다.
정서는 한자의 해서(楷書), 흘림은 한자의 행서(行書)·초서(草書)와 같은 의미이다. 등서체는 정돈되고 규칙적이며, 서한체는 불규칙적이고 자유분망하다.
궁체의 기원에 대해서는 대체로 한글 창제 이후의 한글 판본체(板本體)가 읽기는 쉬우나 쓰기에 어려우므로, 점점 쓰기에 편리한 필사체로 변화, 발전하여 궁체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민정음≫ 원본의 한글은 한자의 전서(篆書)와 같이 획이 둥근 원필(圓筆)을 썼다. 그런데 원필은 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므로 그 뒤에 간행된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 등에서는 쓰기에 편리한 방필(方筆)로 바뀌어 한자의 예서와 같이 획이 모가 진다.
성종 대를 전후하여 이런 방필은 다시 필사의 기풍을 띠기 시작하여 1482년 간행된 ≪두시언해≫를 비롯한 이후의 판본체는 한자의 해서에 가까운 필법으로 변화한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한글의 생활화로 필사의 양이 늘고 여성들이 교양으로 이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선조 대에 이르면 이미 필사체로서 정리되는데, 특히 궁중에서 교서(敎書 : 임금의 명령서)나 봉서(封書 : 왕비가 친정에 내리던 사사로운 편지) 등을 전문으로 쓰는 서사상궁(書寫尙宮)들에 의하여 한글 서체는 체계화되어 아름답고 쓰기에 편리한 필사체가 고안되었다.
숙종 대에 이르면 단아한 궁체가 완성되며, 영·정조대에는 국문학의 융성으로 한글 필사가 크게 늘어나 궁체는 그 완숙기를 맞이한다.
순조 대에서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궁체는 극도로 발달하는데, 서사상궁 중에서 선발된 지밀나인(至密內人)들의 편지글씨는 세련미가 넘친다. 순조비인 순원왕후, 순조의 딸 덕원공주의 글씨와, 상궁 최장희의 <신정왕후전>, 상궁 서희순의 <고종황제전> 등의 글씨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조대비전의 서기였던 이씨라는 여성의 글씨는 궁체의 백미라 하겠다. 궁체는 부드럽고 우아하면서도 예의바른 품위가 있다. 정자는 속도가 더딘 만큼 정중하고 깊은 의지가 담겨 있으며, 흘림은 운필과정에서의 강약·완급의 변화에 따라 뛰어난 시각미를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