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약 25.8㎝, 너비 약 26.4㎝, 비문의 서체는 한예서체(漢隷書體)이고, 자경(字徑)은 약 2.7㎝이다.
244년(동천왕 18) 8월에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國內城)을 점령하고 245년에는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 등이 다시 침공하였는데, 이 전쟁에서 승리한 관구검은 전공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이 때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석각(石刻)의 일부가 1906년 만주의 집안현(輯安縣) 판석령(板石嶺)에서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비면의 좌우와 아래쪽이 떨어져나가서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판독이 가능한 부분은 제1행의 ‘정시삼년고구려반(正始三年高句驪反)’, 제2행의 ‘독칠아문토구려오(督七牙門討句驪五)’, 제3행의 ‘부견구육년오월선(復遣寇六年五月旋)’, 제4행의 ‘토구장군외오환선우(討寇將軍巍烏丸單于)’, 제5행의 ‘위구장군도정후(威寇將軍都亭侯)’,제6행의 ‘행비장군령(行裨將軍領)’, 제7행의 ‘비장군(裨將軍)’ 뿐이다.
이 비가 새겨진 연대에 대해서는 245년설과 246년설이 있지만 대체로 245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관구(毌丘)’가 복성(複姓)이고 검(儉)이 이름이라 보고, 이 비의 명칭도 일반적으로 관구검기공비라 하는데, ‘毌丘’를 ‘무구’로 읽어야 한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