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금석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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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문헌
1668년 서예가 이우가 우리나라 금석문의 탑본(搨本)을 연대순으로 엮은 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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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68년 서예가 이우가 우리나라 금석문의 탑본(搨本)을 연대순으로 엮은 서첩.
내용

7책(正帖 5책, 續帖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라 진흥왕순수비로부터 조선 숙종 시대에 이르는 고비(古碑)·탑비(塔碑)·석당(石幢)·석각(石刻) 등 약 300여종의 탑본을 수집하여, 각 탑본의 일부분을 동일한 크기로 오려 수록하였다.

각 첩의 말미에는 각각의 명칭·찬자(撰者)·서자(書者)·건립연대·소재지 등의 목록을 실었다. 이 중 현재 원석(原石)은 물론 탑본의 조각조차 전하지 않는 희귀본도 있어 단편이지만 가치는 매우 크다.

이우의 자서전 『백년록(百年錄)』 현종 무신 (1668)조에는 “4월집대동금석서법 수서어미수(四月集大東金石書法 受敍於眉叟)”라 적혀 있어 미수(眉叟) 허목(許穆)으로부터 서(敍)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국조인물고』에 이우가 구양수(歐陽脩)의 『집고록(集古錄)』을 본떠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허목의 서문에서 『대동금석서』를 ‘금석첩’이라 하였고, 또 이우가 수집한 금석탑본이 100여 첩이었다고 한 점을 고려하면, 『대동금석첩』의 표본 내지는 목록으로 『대동금석서』를 작성하여 『대동금석첩』의 앞부분에 붙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동금석서』에는 ‘낭원군 화숙 목릉왕손(朗原君和叔穆陵王孫)’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이우의 아우인 낭원군 이간(李偘)이 소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숙은 이간의 자이며, 목릉은 선조의 능호(陵號)이다.

이 책은 탁본을 모은 것으로 옮겨 쓸 수 없기 때문에, 그 목록이 『해동금석총목(海東金石總目)』·『대동금석록(大東金石錄)』·『해동금석서(海東金石書)』 등의 이름으로 학자들 사이에 유포되었다. 이우가 우리 나라의 금석문 탑본을 수집함에 그치지 않고, 그 목록을 작성한 사실은 우리나라 금석학의 기초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금석탑본을 수집한 사람으로는 이우와 같은 시대의 김수증(金壽增)이 유명하며, 그 후 권돈인(權敦仁)·이서구(李書九)·김재로(金在魯) 등도 금석에 뜻을 두었다. 특히,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다수의 동호인이 이루어졌으며, 또 청나라의 금석학에 자극되어 더욱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의 금석문은 청나라의 학자들에게도 전해져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등의 저서를 낳게 되었다. 또한, 김정희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오경석(吳慶錫)의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 등도 저술되기에 이르렀으니, 모두 이우의 『대동금석서』가 이루어진 다음의 일이다.

참고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근역서화징』(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大東金石書解題」(今西龍, 『大東金石書』, 亞細亞文化社, 1976)
집필자
김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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