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책(正帖 5책, 續帖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라 진흥왕순수비로부터 조선 숙종 시대에 이르는 고비(古碑)·탑비(塔碑)·석당(石幢)·석각(石刻) 등 약 300여종의 탑본을 수집하여, 각 탑본의 일부분을 동일한 크기로 오려 수록하였다.
각 첩의 말미에는 각각의 명칭·찬자(撰者)·서자(書者)·건립연대·소재지 등의 목록을 실었다. 이 중 현재 원석(原石)은 물론 탑본의 조각조차 전하지 않는 희귀본도 있어 단편이지만 가치는 매우 크다.
이우의 자서전 『백년록(百年錄)』 현종 무신 (1668)조에는 “4월집대동금석서법 수서어미수(四月集大東金石書法 受敍於眉叟)”라 적혀 있어 미수(眉叟) 허목(許穆)으로부터 서(敍)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국조인물고』에 이우가 구양수(歐陽脩)의 『집고록(集古錄)』을 본떠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허목의 서문에서 『대동금석서』를 ‘금석첩’이라 하였고, 또 이우가 수집한 금석탑본이 100여 첩이었다고 한 점을 고려하면, 『대동금석첩』의 표본 내지는 목록으로 『대동금석서』를 작성하여 『대동금석첩』의 앞부분에 붙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동금석서』에는 ‘낭원군 화숙 목릉왕손(朗原君和叔穆陵王孫)’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이우의 아우인 낭원군 이간(李偘)이 소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숙은 이간의 자이며, 목릉은 선조의 능호(陵號)이다.
이 책은 탁본을 모은 것으로 옮겨 쓸 수 없기 때문에, 그 목록이 『해동금석총목(海東金石總目)』·『대동금석록(大東金石錄)』·『해동금석서(海東金石書)』 등의 이름으로 학자들 사이에 유포되었다. 이우가 우리 나라의 금석문 탑본을 수집함에 그치지 않고, 그 목록을 작성한 사실은 우리나라 금석학의 기초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금석탑본을 수집한 사람으로는 이우와 같은 시대의 김수증(金壽增)이 유명하며, 그 후 권돈인(權敦仁)·이서구(李書九)·김재로(金在魯) 등도 금석에 뜻을 두었다. 특히,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다수의 동호인이 이루어졌으며, 또 청나라의 금석학에 자극되어 더욱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의 금석문은 청나라의 학자들에게도 전해져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등의 저서를 낳게 되었다. 또한, 김정희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오경석(吳慶錫)의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 등도 저술되기에 이르렀으니, 모두 이우의 『대동금석서』가 이루어진 다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