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 묘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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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민 고자(高慈)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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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의 묘지.
내용

세로 2.4척, 가로 2.43척. 글자의 크기[字徑]는 5푼이며, 37행으로 되어 있는데 1행은 36자이다. 1923년 가을, 중국 허난성 뤄양 베이망(河南省洛陽北邙)에서 출토되었다.

고자의 자(字)는 지첩(智捷)으로 그의 선조는 주몽(朱蒙)을 따라 고구려를 세웠고, 후한 말에는 그의 20대조 밀(密)이 연 나라 모용(慕容)과의 싸움에서 공적을 인정받아 고씨(高氏) 성을 받고, 자손들은 후(侯)에 봉해졌다. 고자의 조상들은 고구려 건국 초부터 멸망할 때까지 30대 708년간 대대로 공후장상(公侯將相)을 지냈다.

고자의 증조부 식(式)은 2품 막리지(莫離支), 할아버지 양(量)은 3품 책성도독위두대형 겸 대상(柵城都督位頭大兄兼大相), 아버지 문(文)은 3품 위두대형 겸 장군(位頭大兄兼將軍)의 요직에 있었으나, 고구려가 망하자 문은 형제를 데리고 당나라에 귀화하였다.

그 뒤 고자는 당나라에 봉사하였는데, 696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장무장군행좌표도위익부낭장(壯武將軍行左豹都衛翊府郞將)을 제수 받았으나, 이듬해 거란의 계략에 빠져 33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이에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애도의 뜻으로 고좌금오위대장군유주도독(故左金吾衛大將軍幽州都督)을 추증하였다.

측천무후 성력(聖曆) 3년(700)에 당시의 낙주 합부현 평낙향(洛州合富縣平樂鄕)에 묻혔다. 묘지는 이때에 부장된 것으로 찬자(撰者)·서자(書者) 모두 밝혀지지 않았다. 서체는 해서로 육조시대의 필의가 많아 힘이 있으며, 측천무후가 만든 글자가 적지 않게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남산(男産)의 묘지와 함께,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유민들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금석자료로서 중요하다.

참고문헌

『朝鮮金石攷』(葛城末治, 東京 國書刊行會,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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