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남편 도원군은 의경세자로 책봉되었고, 자신은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粹嬪)이 되었다. 세조는 항상 ‘효부(孝婦)’라 칭찬하였으며, 효부라는 도장까지 하사하였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자 세자 자리는 시동생 해양대군(海陽大君, 예종)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요절하고, 아들 성종이 즉위하였다. 왕실의 가장 어른인 세조비 정희왕후가 예종이 죽던 날 한명회의 사위이자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인 13살 잘산군(乽山君) 즉, 성종을 차기 왕으로 지명하였기 때문이다.
성종은 즉위 후 친아버지 의경세자를 회간왕, 의경왕, 덕종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모셨다. 따라서 소혜왕후도 회간왕비, 의경왕비, 덕종비, 인수왕대비, 인수대비 등으로 불렸다. 소혜왕후는 정희왕후, 성종과 함께 며느리 윤씨를 폐비하고 사사(賜死)하는 데 깊이 관여하였다. 이 때문에 손자인 연산군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갑자사화가 진행되던 1504년(연산군 10) 4월에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사망하였다. 능은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면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소혜왕후는 당시 부녀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서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중국의 『열녀』 · 『소학』 · 『여교(女敎)』 · 『명감(明鑑)』의 네 책에서 부녀자들의 훈육에 요긴한 대목을 뽑아서 3권 4책으로 엮어 『내훈(內訓)』을 편찬하였다. 『내훈』은 조선시대 여성상을 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내명부 및 양반 여성들을 훈육하는 기본 윤리서 역할을 하였다.
또 불교에도 관심이 깊어 혼인 직후 세조를 도와 불경 간행에 참여하였다. 사경(寫經) 사업, 사찰 중수(重修), 불상 조성, 불서(佛書) 간행, 목활자 제작 등을 지원하고, 도첩제 폐지를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