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한방신(韓方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영(韓寧)이고, 아버지는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矴)이며, 어머니는 김영렬(金英烈)의 딸이다. 덕종의 비(妃)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아버지로, 성종의 외할아버지이다.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노구산(盧龜山) 등과 같이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된 황씨(黃氏)와 누나를 호송하였다. 누나가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세종 1) 1월 명나라의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부사인 홍로시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귀환하였다. 1420년 1월 광록시소경으로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했던 금과 은의 공물면제를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도 자결하였다. 그러자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선하였다. 그래서 1429년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 행중추원부사·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38년 중추원사, 1439년 판한성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병조판서·함길도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43년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를 겸하였다. 1446년까지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인사에 공정을 기해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도관찰사 겸 평양윤으로 파견되고, 1448년에는 병마절도사까지도 겸임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찬성이 된 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좌의정이 되고, 좌익공신 1등에 올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다시 봉해졌다. 1456년 사은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라고 설득하였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에서 졸하였다.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했지만, 넓은 도량과 온순하면서도 대범한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