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인의 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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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사건
1418년(태종 18) 강상인이 태종의 병권친장책(兵權親掌策)에 저촉되어 처단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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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418년(태종 18) 강상인이 태종의 병권친장책(兵權親掌策)에 저촉되어 처단된 사건.
내용

그 해 8월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를 하면서 양위교서에 “주상이 장성하기까지 군사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하겠고, 또 국가의 결단하기 어려운 일은 의정부와 육조에 명령하여 각기 가부를 들어 시행하겠지만, 나도 마땅히 가부의 논의에 참여하겠다.”고 하여 세종의 왕권과 국기(國基) 확립을 위한 군국중사(軍國重事)에의 참여를 표명하였다.

그에 따라 병사를 관장하는 병조와 병방대언(兵房代言)의 지휘는 물론, 종래의 3군부(三軍府) 이외에 의건부(義建府)를 설치, 그 휘하에 두는 등 병권의 친장을 꾀하였다. 그 때, 강상인은 상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시종하다가 태종의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또한 태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여러 군직을 거쳐 병조참판에 올라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병조의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상인은 태종의 신임과 기대 및 병권친장책의 의도와 달리 병조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만 보고했으며, 동생 상례(尙禮)를 불법으로 사직(司直)에 제수시켰다. 이에 태종은 강상인의 행위와 병조가 정사를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은 사유를 국문하였다.

8월에 강상인을 비롯하여 병조 관리를 중죄에 처하라는 대간의 요구가 있었지만, 특별히 강상인은 원종공신이고 그 동안 태종을 섬긴 노고를 참작해 전리귀향(田里歸鄕)에 처했다가, 그 해 9월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을 몰수하였다. 그 밖에 병조 관리도 경벌하여 강상인 등의 처벌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던 중 그 해 9월, 명나라의 왕세자 교체 승인에 대한 사은사로 파견되는 국구(國舅)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심온(沈溫)을 위한 환송 인파가 외척의 득세를 경계하고 있던 태종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그 해 11월에는 평소 강상인 및 심온의 동생인 도총제 심증(沈泟)에게 혐의를 가지고 있던 병조좌랑 안헌오(安憲五)가 태종에게 “강상인·심증·박습이 일전에 사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를, 요사이 호령이 두 곳에서 나오는데, 한 곳에서 나오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고 참소하여 태종의 외척에 대한 의구심을 가중시켰고, 이와 함께 강상인 등에 대한 격분을 유발시켰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26일 재추국(再推鞫)을 당하여 “태종과 세종을 이간시키려 했다.”는 죄명으로 옹진진(甕津鎭)에 충군(充軍)되었다가 의금부의 장계에 따라 모반대역죄로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박습·심증도 참살당했음은 물론, 심온도 연좌되어 사사되었다.

강상인의 사건은 그의 개인적인 과오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태종의 병권에 대한 집념 및 외척 경계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외척 세력의 제거는 1419년(세종 1)에 태종이 주도하여 단행된 대마도정벌과 함께 세종 치세의 한 토대가 되었다.

참고문헌

『태종실록』
『세종실록』
『연려실기술』
「조선초기의정부연구」(한충희, 『한국사연구』 31·32, 1980·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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