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국균(國鈞). 강회중(姜淮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안수(姜安壽), 아버지는 증 판서 강휘(姜徽), 어머니는 이희지(李希智)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소과(小科)에 합격하고, 외할아버지의 문음(門蔭)으로 돈녕부부승(敦寧府副丞)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457년 돈녕부승으로서 친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우필선(世子侍講院右弼善)에 초천(超遷)되었다. 이어 장령 · 통례문부지사(通禮門副知事) ·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 성균관사성 · 종부시정 등을 역임했다.
1466년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 우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전명(傳命)을 소홀히 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1469년(예종 1) 대사간에 복직되었다.
1470년(성종 1)에는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국왕이 될 만하다는 권맹희(權孟禧)의 말을 들었으나, 이를 고변하지 않은 까닭으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진해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고 그 이듬해 고신(告身: 관직 임명 사령장)을 환급받았다. 1473년 순장(巡將)으로 복직되고 곧 성주목사로 파견되었으며, 1474년에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으로 입조, 다시 진주목사로 나갔다.
이어 형조참의 · 대사간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1483년 우승지에 올랐으나, 또다시 전명을 소홀히 한 일로 충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484년 형조참의에 서용되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 곧 전라도관찰사로 옮겼으며, 1486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어 입조하던 중 죽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1482년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폐출 때에 승지로서 인수대비(仁壽大妃)의 윤비폐출 교지를 봉명했던 일로 추죄(追罪: 과거에 저지른 죄를 물음)되어 직첩을 몰수당했다. 중종의 즉위와 함께 직첩을 환급받았고, 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