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첩제(度牒制)는 국가에서 승려의 수를 관리하고 불교 교단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적 장치이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에 시작되어 당나라 때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고려 후기에 국가에서 승려를 관리하던 관단(官壇) 체제가 무너지면서 면역승(免役僧)과 비면역승(非免役僧)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이에 따라 출가자의 수도 급증해 면역의 수혜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첩제를 시행하였다. 조선이 개창(開創)된 후에는 불교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고 승려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도첩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따라서 도첩제는 역(役)을 면제받는 승려 수를 억제하여 군정(軍丁)을 확보하고 아울러 불교의 인적 기반을 축소해 나가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1325년(고려 충숙왕 12) 향리층(鄕吏層)의 출가 사례가 도첩제를 시행한 최초의 기록이다. 공민왕 때에는 도첩을 발급받을 수 있는 대상을 향리뿐 아니라 일반인으로까지 확대했고, 정전(丁錢) 납부의 원칙을 정했다.
조선시대에 승려의 범주는 부역을 면제받는 도첩 승려와 도첩이 없어서 부역을 해야 하는 하급 승려로 뚜렷이 구분되었다. 조선 초기에 출가 승려가 되려면 양반의 자제는 포(布) 100필, 서인(庶人)은 150필, 천인은 200필의 정전을 내면 도첩을 발급해 주었다.
1424년(세종 6)에는 기존의 불교 종파들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하고, 불교를 담당하던 승록사(僧錄司)를 혁파했다. 대신 서울 흥천사(興天寺)와 흥덕사(興德寺)에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도회소(都會所)를 두어 예조의 관할 하에 승과(僧科)를 시행하고 도첩을 발급하는 등 승려의 인사와 승적을 관리하도록 했다.
세조 때에는 규정을 바꾸어 교종이나 선종의 도회소에서 실시하는 송경(誦經)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정전으로 포 30필을 내면 도첩을 지급받을 수 있게 하였다. 송경 시험은 『심경(心經)』, 『금강경(金剛經)』, 『살달타(薩怛陁)』를 외우는 것이었다. 이는 성종 대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도승조(度僧條)에 명기되었다.
1461년(세조 7)에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이 임시로 시행되었는데, 이는 공역(公役)에 동원된 부역승(赴役僧)에게 도첩 대신 호패를 지급하는 것이었다. 역을 마쳤음을 증명하는 승인호패법은 성종이 즉위하면서 1469년에 폐지되었고, 1492년(성종 23)에는 군역을 확보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도첩 발급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다. 1497년(연산군 3) 도첩 발급이 다시 재개되었지만, 1516년(중종 11) 『경국대전』의 도승조가 사문화됨으로써 도첩제는 폐지되었다. 1550년(명종 5) 문정왕후에 의해 선교양종이 재건되면서 도승과 승과도 다시 실시되었다가, 1566년 선교양종의 혁파와 함께 도첩제 또한 막을 내렸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승려들이 의승군으로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고, 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선과첩(禪科帖)을 지급하였다. 선과첩은 원래 승과 급제자에게 주던 것이었지만 이때에는 승려 자격증인 도첩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승려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승려의 활동을 인정하는 승역(僧役)을 도첩제 대신 제도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도첩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국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승려의 자격을 국가가 인정해 준 제도이다. 이는 국가가 승정 체계를 운영하고 불교계의 인적 재생산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준 핵심적인 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