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 ()

목차
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궁중에서 잔일을 하는 궁녀의 하녀.
이칭
이칭
비자(婢子), 각심이, 방아이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조선시대
내용 요약

방자는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잔일을 하는 궁녀의 하녀이다. 비자(婢子) · 각심이 · 방아이 등의 별칭이 있으며, 궁녀의 하녀로 각사의 여종 출신들이다. 나인과 차이가 있었다. 또 ‘궁녀가 사사로이 역속(役屬)을 갖는 것을 방자’라 하였고, ‘방자나인은 곧 나인의 종’이라고 하였다. 방자의 급료는 국가에서 주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궁중에서 잔일을 하는 궁녀의 하녀.
내용

세종 대 기록에 따르면 "방자는 궁중에서 잔일하는 자이니, 주1주2를 택하여 시킨다."고 하였다. 각 전(殿)과 궁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명단은 사약(司鑰)이 관장하였다. 태종은 1414년(태종 14)에 명빈전(明嬪殿)의 시녀 3인을 내보내고, 방자 등으로 주3을 바꾸게 하였다. 이어 1416년(태종 16)에는 주4를 만나 나이가 장성한 시녀와 방자를 골라서 내보내고 방자는 제 집에서 왕래하게 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의정부에서 상왕전(上王殿)의 시녀 10인, 무수리 5인, 주5 2인, 주6 2인, 방자 4인, 양 별실(別室)의 시녀 각각 2인, 무수리 각각 1인, 각 색장(色掌) 20인을 2번(番)으로 나누게 하였다.

1470년(성종 1)에는 대왕대비전에는 시녀 10인, 무수리 6인, 파지(巴只) 4인, 수모 3인, 방자 5인, 주7 1인으로, 왕대비전에는 시녀 9인, 무수리 5인, 파지 3인, 수모 2인, 방자 7인, 여령 1인으로, 대전에는 시녀 20인, 무수리 10인, 파지 6인, 방자 12인, 여령 1인으로 하여 주8 · 주9 · 주10 등을 주게 하였다.

연산군은 방자가 심부름할 때 매를 맞기도 하였기 때문에 궁궐을 나가게 되면 원한을 품고 내간의 일을 퍼뜨리는 자가 더러 있으니 궁을 나간 방자들이 궁중 내의 일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방자 중에는 시간제로 부리는 반방자가 있고, 붙박이로 부리는 온방자가 있었다. 반방자와 온방자는 보수도 달랐다.

변천사항

조선시대 지방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던 남자 종 중에도 방자라 불리는 부류가 있었다. 1448년(세종 30)에는 "남자 종을 방자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임진왜란 동안에는 굶주린 백성이 병영에 들어가서 방자가 되기도 하고 주11의 방자나 중국군의 방자가 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주12이 잇따라 입성(入城)하였기 때문에 각 처의 방자 · 역군(役軍)을 요구하는 즉시 응하여 주었다. 각 고을 관아에 주13도 있었으며, 장용영에는 방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이 있었다. 남자 종으로서 방자는 『춘향전』에 잘 나타나 있다.

참고문헌

원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단행본

신명호, 『궁녀』(시공사, 2012)

논문

홍순민, 「조선시대 궁녀의 위상」(『역사비평』 68, 역사문제연구소, 2004)
이영숙, 「조선초기 내명부에 대하여」(『역사학보』 96, 역사학회, 1982)
주석
주1

서울에 있던 관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별궁ㆍ본곁ㆍ종친 사이의 문안 편지를 전달하던 여자 종.    우리말샘

주3

차례로 숙직이나 당직을 하는 일.    바로가기

주4

가뭄으로 인하여 생기는 재앙.    우리말샘

주5

궁중(宮中)에서 잡역(雜役)에 종사하는 여자 하례(下隷)의 하나.    바로가기

주6

물어미. 물 긷는 일을 맡아 하는 여자 종.    바로가기

주7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베푸는 각종 잔치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던 여자.    우리말샘

주8

임금이 봄·가을로 궁인(宮人)들에게 옷감으로 주는 피륙이나 물건.    바로가기

주9

관아에서 벼슬아치에게 끼니때에 식사를 제공하던 일. 또는 그 식사.    우리말샘

주10

한 달을 단위로 하여 지급하는 급료. 또는 그런 방식.    우리말샘

주11

항복해 온 왜인.    바로가기

주12

병사의 수가 많은 군대.    우리말샘

주13

경주인(京主人)에게 딸리어 심부름을 하던 하례.    바로가기

집필자
한희숙(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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