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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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
남북국시대 신라, 가야산 해인사의 사간장경판을 만드는 데에 공헌한 전설 속의 불교인.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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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거인은 경상남도 합천 출신이다. 가야산 해인사의 사간장경판(寺刊藏經板)을 만드는 데 공헌한 전설적인 인물로 전한다. 온순한 성품을 지녔으며, 지금의 면장에 해당하는 이서(里胥)를 맡고 있었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인서(仁胥)라고 불렀다. 이 기록은 이거인의 생애라기보다는 일종의 전설로, 그로 말미암아 해인사의 사간장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힌 영험담이다. 이 설화는 불교의 민간 신앙 형태를 보여 주는 자료가 된다.

정의
남북국시대 신라, 가야산 해인사의 사간장경판을 만드는 데에 공헌한 전설 속의 불교인.
개설

이거인(李居仁)은 경상남도 합천 출신으로, 가야산 해인사의 사간장경판(寺刊藏經板)을 만드는 데 공헌한 전설적인 인물로 전한다. 온순한 성품을 지녔으며, 지금의 면장에 해당하는 이서(里胥)를 맡고 있었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인서(仁胥)라고 불렀다.

생애 및 활동 사항

842년(문성왕 4) 그는 시체를 관에 넣어 묻고 제물을 차려서 장사를 지냈다. 846년 10월 이거인이 죽어서 명부(冥府)에 갔는데 세 눈을 가진 왕이 오봉관(五峰冠)을 쓰고 심판을 하고 있다가 그를 보자 반가이 맞았다. 왕은 자신이 명부에서 허물을 지어 3년 동안 강아지로 변해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그때 이거인이 베풀어 준 은혜에 감사한다고 하면서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거인은 앞으로 명부에서 물을 말에 대한 대답을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하자, 왕은 이를 일러 주었다. 이거인은 그 가르침대로 염라대왕 앞에서 “법보(法寶)가 소중하다고 하기에 경판을 새겨서 널리 유포하려 하다가 일을 이루지 못하고 명부로 왔다.”라고 하였다. 이에 염라대왕은 명부에서 이거인의 이름을 없앤 뒤 돌려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세 눈을 가진 왕을 찾으니, 돌아가서 책을 매어 ‘장경판각공덕문(藏經板刻功德文)’이라 쓰고 관청에서 도장을 받아 두도록 하였다. 그가 승낙하고 물러나면서 기지개를 하고 깨어나니 한바탕의 꿈이었다. 곧 권선문(勸善文)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847년 봄, 궁중의 공주들이 한꺼번에 병이 나서 고칠 수 없었는데, 하루는 공주들이 왕에게 불경을 제작하는 화주(化主:불사를 총 진행하는 사람)를 불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거인이 왕궁으로 가자 세 눈 왕의 혼을 의탁받은 공주들이 왕에게 불경 간행에 시주할 것을 부탁하여 왕이 허락하자 곧 병이 나았다. 왕은 사재를 보시하고 나라 안의 여러 양공(良工)들을 모았으며, 거제도에서 재목을 내고 불경을 새기게 한 뒤 가야산 해인사에 모시고 열두 번 경찬회(慶讚會)를 베풀었다. 이거인 내외는 그 뒤 편안히 오래 살다가 극락왕생하였다고 한다.

생애라기보다는 일종의 전설로서, 그로 말미암아 해인사의 사간장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힌 영험담이다. 이 설화는 불교의 민간 신앙 형태를 보여 주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단행본

논문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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