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海圓)은 몽골에서 활동한 유가종 승려이다. 호는 원명(圓明)이며, 전라북도 함열(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출신이다. 아버지는 검교감문위대호군(檢校監門衛大護軍) 조혁(趙奕)이며, 어머니는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이씨이다. 12세에 금산사(金山寺) 석굉(釋宏)의 문하에 출가하고 경론을 배웠다. 1294년(충렬왕 20)에 승과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고, 불주사(佛住寺) 주지가 되었다.
1305년에 몽골제국의 안서왕(安西王)의 초청으로 몽골에 갔으며,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일상화된 곳에서 계율을 잘 지켜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몽골 황실의 두터운 후원을 받았고, 1312년(충선왕 4)에 무종(武宗)이 발원하고 인종 대에 완공한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의 초대 주지로 임명되어 29년간 머물렀다. 고려 왕실은 몽골 황실에 소를 올려 해원을 금산사(金山寺) 주지로 임명할 것을 청하였고, 혜감원명편조무애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礙國一大師)의 호를 내리고 중대광(重大匡) 우세군(祐世君)에 봉하였다. 해원은 유식학(唯識學)에 밝았으며, 1340년에 입적하였다. 5년 후에 제자인 현인(玄印) 등이 숭은복원사에 대숭은복원사 고려제일대사원공비(高麗第一代師圓公碑)와 탑을 세웠다.
해원은 주로 몽골제국의 수도에서 활동하였는데, 당시 유가종의 동향, 충선왕을 비롯한 고려 왕실의 재원 활동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유가종은 고려 기에 현종의 원찰인 현화사(玄化寺)가 개창된 이후 화엄종과 함께 양대 세력으로 존재하였으며, 특히 인주(仁州) 이씨와 연결되어 있었다. 무신란 이후 유가종이 위축되었다가 원 간섭기에 몽골의 요구로 성행한 사경을 주로 담당하면서 충렬왕이 현화사를 중수할 정도로 다시 부각되었다.
당시 유가종의 혜영(惠永)이 충렬왕 16년에 사경승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몽골에 들어가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사경하였고, 이를 계기로 차츰 부원 세력과 밀착되었다. 그후 미수(彌授)가 충렬왕 34년에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 충숙왕 즉위년에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으로 우세군(祐世君)이 되었고, 따로 일품의 녹봉을 받았다. 나아가 충숙왕 2년에 참회부(懺悔府)가 설치되자 미수가 승정을 장악하였다. 이와 같이 원 간섭기에 유가종이 새롭게 부각되는 동향과 함께 충선왕을 비롯한 고려 왕실이 몽골제국의 부마로서 대도(大都)에 머물며 몽골제국의 정치에 개입하거나 지배층, 한인 사대부 문인층과의 문화적 교류가 확산되었다. 더욱이 비교적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게 되면서 고려의 승려, 문인들이 대거 몽골제국에 들어가 유학과 순례에 나섰다. 따라서 해원의 재원 활동은 이러한 고려와 몽골과의 문화적 교류가 확산되는 가운데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