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후기, 몽골 황제인 무제의 원찰인 숭은복원사 주지를 지낸 유가종 승려.
가계 및 인적 사항
주요 활동
해원은 주로 몽골제국의 수도에서 활동하였는데, 당시 유가종의 동향, 충선왕을 비롯한 고려 왕실의 재원 활동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유가종은 고려 기에 현종의 원찰인 현화사(玄化寺)가 개창된 이후 화엄종과 함께 양대 세력으로 존재하였으며, 특히 인주(仁州) 이씨와 연결되어 있었다. 무신란 이후 유가종이 위축되었다가 원 간섭기에 몽골의 요구로 성행한 사경을 주로 담당하면서 충렬왕이 현화사를 중수할 정도로 다시 부각되었다. 당시 유가종의 혜영(惠永)이 충렬왕 16년에 사경승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몽골에 들어가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사경하였고, 이를 계기로 차츰 부원 세력과 밀착되었다. 그후 미수(彌授)가 충렬왕 34년에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 충숙왕 즉위년에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으로 우세군(祐世君)이 되었고, 따로 일품의 녹봉을 받았다. 나아가 충숙왕 2년에 참회부(懺悔府)가 설치되자 미수가 승정을 장악하였다. 이와 같이 원 간섭기에 유가종이 새롭게 부각되는 동향과 함께 충선왕을 비롯한 고려 왕실이 몽골제국의 부마로서 대도(大都)에 머물며 몽골제국의 정치에 개입하거나 지배층, 한인 사대부 문인층과의 문화적 교류가 확산되었다. 더욱이 비교적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게 되면서 고려의 승려, 문인들이 대거 몽골제국에 들어가 유학과 순례에 나섰다. 따라서 해원의 재원 활동은 이러한 고려와 몽골과의 문화적 교류가 확산되는 가운데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원전
- 『동문선(東文選)』
단행본
-
논문
-
인터넷 자료
-
기타 자료
-
주석
-
주3
: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은 도시. 우리말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