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 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1018년(현종 9)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1020년 8월 현종이 안서도(安西道)에 명하여 둔전(屯田) 1,240결(結)을 이 절에 주게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해 9월 현종은 이 절에 들러 새로 주조한 동종을 타종하였고, 10월에는 이 절의 승려 법경(法鏡)을 왕사(王師)로 삼았으며, 1021년에는 현종이 행행(行幸)하여 비문(碑文)의 전제(篆題)를 썼다. 1032년(덕종 1) 5월에는 덕종이 현종의 휘신도량(諱辰道場)을 개설하였고, 1047년(문종 1)에는 문종이 다시 현종의 휘신도량을 개설하였으며, 1052년 3월에는 반승(飯僧)을 베풀었다.
1067년 9월에는 이 절에 주석하고 있던 해린국사(海麟國師)가 노환을 이유로 산으로 돌아가려 하자, 문종이 절에 들러 그에게 다약(茶藥)과 금은기(金銀器) 등의 보물을 전달하였고, 1070년에는 왕자 탱(竀)을 이 절에 보내어 승려로 만들었다. 1095년(헌종 1)에는 태후가 선종의 소상재(小祥齋)를 베풀었고, 1102년(숙종 7)에는 숙종이 은자유가현양론(銀字瑜伽顯揚論)의 경찬법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 절에 왔다.
특히, 의종은 이곳에 자주 행차하여 반승과 무차대회(無遮大會) · 나한재(羅漢齋) 등을 베풀었으며, 현화사 장흥원(長興院)에서 과시(科試)를 보았고, 유희를 위하여 이곳 동령(東嶺)에 청녕재(淸寧齋)라는 별관을 건립하였다.
청녕재를 지을 때 한 역졸(役卒)은 너무 가난하여 늘 밥을 굶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밥을 한 숟가락씩 얻어 먹으며 일을 하였는데, 그의 부인은 자신의 머리채를 잘라 판 뒤 그 돈으로 밥을 지어 신세진 이들에게 밥을 대접하였으나, 그 사실을 알고 아무도 목이 메어 밥을 먹지 못하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의종은 이러한 고초도 아랑곳없이 날마다 술잔치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최후를 맞게 되었다.
1216년(고종 3)에 고종은 이 절에 있던 안종(安宗) · 현종 · 강종의 신어(神御)를 숭교사로 옮겼고, 1225년 8월에는 강종의 기일에 행향(行香)하였다. 1276년(충렬왕 2)에 왕은 공주와 함께 이 절에 와서 승지에게 명하여 불전(佛殿)을 보수하게 하였고, 1283년에는 이 절을 중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 절의 폐사 연대 및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옛 절터에는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39호 칠층석탑과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151호 석비(石碑), 당간지주, 석불잔석(石佛殘石), 석교(石橋) 등이 남아 있고,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는 일제강점기 절터에서 수습된 석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