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은 고려 전기 제15대(재위: 1095~1105) 왕이다.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했다. 1097년(숙종 2) 주화를 만들어 통용시켰고, 1101년 은병을 만들었으며, 1102년 해동통보 1만 5천 관을 만들어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했다. 양주에 남경을 두어 궁궐을 지었으며, 서경에 기자사당을 만들었다. 여진정벌을 단행하였지만 실패하고, 별무반을 처음 설치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수레 안에서 사망했다.
재위 1095∼1105년. 초명(初名)은 왕희(王熙), 이름은 왕옹(王顒), 자(字)는 천상(天常). 문종(文宗)의 3남이며 순종(順宗)· 선종(宣宗)의 동모제(同母弟)이다. 비(妃)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왕태후(明懿王太后)이다.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 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 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라는 평을 받았다. 1065년(문종 19) 2월에 계림공(鷄林公)에 봉해졌다. 친조카인 헌종(獻宗)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모후(母后)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출신 사숙태후(思肅太后)가 수렴 정치를 하게 되었고, 이에 같은 인주이씨 이자의(李資儀)와의 갈등을 불러왔다. 하지만 외척(外戚) 세력의 지나친 정치적 간섭에 반발한 계림공이 왕국모(王國髦)· 소태보(邵台輔) 등과 더불어 새로운 왕위 교체를 시도했던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고 헌종으로부터 양위 받아, 1095년(숙종 즉위년)에 즉위하였다. 숙종은 스스로 국왕을 해야 하는 당위성으로서 ‘국가 안위’가 달린 문제 해결을 자처하고 나섰다고 하겠다.
1096년(숙종 1)에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다. 1097년(숙종 2) 12월에 화폐를 주조하는 관청인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鑄貨)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화폐 사용을 편리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화폐 정책을 이끌었던 이가 동생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다. 그는 같은 해에 국청사(國淸寺)의 주지로 임명되어 천태종(天台宗)을 새로 세워 교선(敎禪) 대립을 융화하고자 하였다. 1101년(숙종 6) 4월에는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銀甁)을 주조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이를 활구(闊口)라 불렀다. 이듬해인 1102년(숙종 7)에는 고주법(鼓鑄法)을 제정해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 5천 관(貫)을 만들어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으며, 거리 양쪽에 점포(店鋪)를 두어 돈을 사용하는 이익을 알도록 하였다. 1099년(숙종 4)에는 김위제(金謂磾)의 주장에 따라 남경(南京)을 중시하여 친히 터를 잡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으며, 5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 이러한 숙종의 개혁 정책은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추진된 신법(新法) 정책과 비교된다. 1102년 예부(禮部)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라고 하자, 이에 서경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1104년(숙종 9)에 동여진(東女眞)의 오아속(烏雅束)이 기병을 정주(定州) 관문 밖에 주둔시켰다. 이에 임간(林幹)을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事)로 임명하여 대비케 하였는데, 같은 해 2월에 정주성(定州城) 밖에서 여진과 싸우다가 패하였다. 3월 윤관(尹瓘)이 여진정벌(女眞征伐)을 꾀했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和約)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윤관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 등 별무반(別武班)을 처음 설치하였고, 그 결과는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로 이어졌다. 1105년(숙종 10) 서경(西京)에 순행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開京)으로 돌아오다가 10월에 수레 안에서 죽으니 향년 52세였다. 태자 왕우(王俁: 예종)가 유조(遺詔)를 받들어 즉위하였다.
능(陵)은 북한 개성시 장단군 진서면 판문리 구정동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명효(明孝)이다. 이후 1140년(인종 18)에 문혜(文惠), 1253년(고종 40)에 강정(康正)으로 시호를 각각 더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