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루가치(達魯花赤)는 몽골의 관직 이름으로서 초기 점령지의 시정관(施政官)으로 창설했다가, 원나라에서는 지방 행정 관청의 감독관으로 설치되었다.
1231년(고종 18) 몽골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비롯한 북방 지역을 휩쓸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開京)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별동 부대를 남하시켜 광주(廣州) · 충주(忠州) · 청주(淸州) 등지를 유린하였다. 이것이 바로 몽골의 제1차 침입이다.
고려는 왕족 회안공(淮安公) 왕정(王侹)을 몽골의 장수 살리타이[撒禮塔]가 주둔하고 있던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安州)에 보내 강화를 맺었다. 이때 살리타이는 개경과 그들이 경략(經略)한 주군(州郡)에 다루가치 72인을 두고 물러갔다.
1232년(고종 19) 다루가치들이 고려에서 모두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내용은 모두 『원사(元史)』와 『원고려기사(元高麗紀事)』 등 원나라의 사료에서만 나올 뿐 고려 쪽 사료에는 보이지 않아 확실히 믿을 수는 없다. 몽골이 경략한 주현(州縣)이 북방의 20개 정도인데, 72인의 다루가치는 그 수가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들을 모두 살해했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도 믿기 어렵다.
그러나 『고려사』 세가(世家)에는 1232년 5월 “ 북계(北界)의 용강(龍岡) · 선주(宣州, 지금의 宣川)에 다루가치 5인이 왔다.”라고 하였고, 그해 7월에는 “내시 윤복창(尹復昌)을 북계의 여러 성에 보내 다루가치의 궁시(弓矢)를 빼앗게 했는데, 선주에서 다루가치가 그를 사살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원이 다루가치를 배치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리고 그들의 행패가 심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8월 기록에는 “서경순무사(西京巡撫使) 민희(閔曦)가 사록(司錄) 최자온(崔滋溫)과 더불어 다루가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서경 사람들이 이를 듣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 서경이 평주(平州)처럼 몽골 군사에게 전멸당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보면, 다루가치가 살해당한 것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다루가치 살해사건은 고려의 몽골에 대한 저항 의식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72인의 다루가치를 모두 살해했다는 중국 측 사료의 내용은 다분히 과장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