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재는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여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을 거처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된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인준(金仁俊)과 유경(柳璥) 등을 중심으로 최씨 무신 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崔竩)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김용재는 김준의 아들이며, 전전승지동정(殿前承旨同正)으로 정변에 참여였다. 이후 김주(金柱)로 개명하고서 김준 집권기에 권력을 남용하다가 임연(林衍) 등의 무진정변 때 제거되었다.
김용재는 김준의 둘째 아들로서 최씨 무신 정권(崔氏武臣政權) 때 궁중의 각종 잡역(雜役)을 담당하는 무산계(武散階)의 하나인 정9품의 전전승지동정(殿前承旨同正)에 임명되었다. 1258년(고종 45) 3월에 아버지인 별장(別將) 김준과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 등이 중심이 되어 최씨 무신 정권을 붕괴시킨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였다. 무오정변은 최의(崔竩) 정권의 정치 · 경제적 실정에 불만을 품은 여러 정치 세력이 결집하여 4대 집정자인 최의를 죽이고 왕정복고를 이룩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때 김용재의 형인 김대재(金大材), 아우인 김식재(金植材) 등도 같은 전전승지동정으로 함께 참여하여 공로를 세웠다. 같은 해 4월에 유경 · 김준 · 박희실 등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봉된 후, 같은 해 7월에 김용재는 차송우(車松祐) 등과 함께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 공력보좌공신(同力輔佐功臣)) 19인(혹은 20인)에 책록되었다. 이어서 1260년(원종 원년) 6월에 위사공신 13인에 포함됨으로써 위사보좌공신에서 위사공신으로 승격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후 김주(金柱)로 개명하였고, 누차 승진하여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다. 1268년(원종 9) 12월에 국왕 원종(元宗)의 밀명에 따라 낭장(郎將) 강윤소(康允紹),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임연(林衍) 등이 김준을 암살한 후, 야별초(夜別抄)를 보내 김준의 여러 아들과 그 일당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때 김주가 도방(都房)의 군사를 규합하여 저항하다가 원종의 명을 받은 박성대(朴成大)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258년 7월 위사보좌공신에 이어 1260년 6월 위사공신 13인에 책록되었고, 2년 후인 1262년(원종 3) 10월에 공신당(功臣堂)의 벽상(壁上)에 도형(圖形)이 그려졌다. 1268년(원종 9) 12월에 아버지 김준이 피살된 후 벽상공신(壁上功臣) 호칭이 삭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