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중앙의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에게 지배층의 위계 제도로서 문산계(文散階)를 지급하였다. 무산계(武散階)는 이들 문 · 무의 관료와 정치적 위상이 달랐던 향리(鄕吏) · 늙은 병사 · 공장(工匠) · 악인(樂人)과 탐라(耽羅)의 왕족, 여진(女眞)의 추장 등에게 지급할 목적으로 설치 · 운영한 위계 제도이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위계 제도는 건국 초기부터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신라(新羅)와 태봉(泰封)의 제도를 사용하다가, ' 대광(大匡)' · ' 정광(正匡)' · ' 대승(大丞)' · ' 대상(大相)'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관계(官階)는 중앙의 지배층과 중앙에 조회하거나 국왕을 대면한 지방 지배층이 받았다.
광종(光宗) 이후 중국 제도를 도입하여 중앙의 문신과 무신에게 문산계를 지급하면서, 기존의 관직 등급은 향직(鄕職) 16등급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995년(성종 14) 문산계를 정비하는 동시에 문 · 무신과 정치적 위상이 달라 구별되는 세력에게 지급하는 위계 제도로서 무산계를 설치하였다.
무산계는 종1품에서 종9품하까지 29등급으로 나뉜다. 1품에서 3품까지는 대장군(大將軍), 4품과 5품은 장군(將軍), 6품에서 9품까지는 교위(校尉)와 부위(副尉)로 구성되었다. 또한 1품에서 3품까지는 정(正) · 종(從)의 구분만 있고 상 · 하의 구분은 없으나, 4품에서 9품까지는 정 · 종의 구분과 상하의 구분이 모두 있어 차이가 있었다. 무산계는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종1품),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정2품), 진국대장군(鎭國大將軍, 종2품),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정3품),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 종3품)과, 중무장군(中武將軍, 정4품상), 장무장군(將武將軍, 정4품하), 선위장군(宣威將軍, 종4품상), 명위장군(明威將軍, 종4품하), 정원장군(定遠將軍, 정5품상), 영원장군(寧遠將軍, 정5품하), 유기장군(遊騎將軍, 종5품상), 유격장군(遊擊將軍, 종5품하), 그리고 요무교위(耀武校尉, 정6품상), 요무부위(耀武副尉, 정6품하), 진위교위(振威校尉, 종6품상), 진위부위(振威副尉, 종6품하), 치과교위(致果校尉, 정7품상), 치과부위(致果副尉, 정7품하), 익휘교위(翊麾校尉, 종7품상), 익휘부위(翊麾副尉, 종7품하), 선절교위(宣折校尉, 정8품상), 선절부위(宣折副尉, 정8품하), 어모교위(禦侮校尉, 종8품상), 어모부위(禦侮副尉, 종8품하), 인용교위(仁勇校尉, 정9품상), 인용부위(仁勇副尉, 정9품하), 배융교위(陪戎校尉, 종9품상), 배융부위(陪戎副尉, 종9품하)로 구성되었다.
1076년(문종 30) 전시과(田柴科)를 정비하면서 무산계 수여자에게도 전시과를 지급하였다. 관군대장군 · 운휘대장군에게 전(田) 35결(結), 시(柴) 8결을, 장무장군 · 선위장군 · 명위장군에게 전 30결을, 영원장군 · 정원장군 · 유기장군 · 유격장군에게 전 25결을, 요무교위 · 요무부위 · 진위교위 · 진위부위 · 치과교위 · 치과부위 · 익휘교위 · 익휘부위에게 전 22결을, 선절교위 · 선절부위 · 어모교위 · 어모부위 · 인용교위 · 인용부위 · 배융교위 · 배융부위에게 전 20결을 지급하였다.
무산계 수여자는 1등급에서 5등급까지 분류되었으며, 이들에게는 전시과를 6등급으로 구분해서 지급하였다. 표기대장군 · 보국대장군 · 진국대장군은 지급 대상에서 빠져있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또한 6등급으로 대장(大匠) · 부장(副匠) · 잡장인(雜匠人) 등의 공장과 어전부(御前部)의 악건(樂件)과 악인 등이 무산계 전시과 전 17결을 지급하였다.
원래 문산계와 무산계는 각각 문신과 무신의 위계 제도로서, 당(唐) · 송(宋)이나 조선에서는 문 · 무신의 위계를 구별하는 제도로 문산계와 무산계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문신과 무신에게 문산계를 적용하였고, 이들과 구별하여 향리 · 늙은 병사 · 공장 · 악인과 탐라의 왕족, 여진의 추장 등에게 무산계를 적용하여 운영상 차이가 있었다. 고려에서 이 제도는 문 · 무신 관료와 향리를 비롯한 다른 계층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산계는 지급 대상에 따라 구별하여 수여하였다. 당 · 송의 무산계는 자국인에게 수여하는 무산계와 이민족의 번신(藩臣)에게 수여하는 무산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고려도 이러한 방식을 수용하여 내국인인 향리 · 늙은 병사 · 공장 · 악인과 탐라의 왕족은 종1품 표기대장군에서 종9품하 배융부위까지의 무산계를 수여하였다.
내국인의 경우 개경(開京)에 올라와 공무를 수행하거나 중앙 관부에 소속된 인물에게 무산계를 주었다. 원단(元旦)에 궁궐에서 숙배(肅拜)를 하거나 조세(租稅)와 공물(貢物)의 납부를 위해 개경에 올라와 공무를 수행하는 향리, 중앙 관부에 배속된 공장과 악인, 양경(兩京) 제진군(諸鎭軍)의 무직자(無職者)인 늙은 병사 등에게 무산계를 주었던 것이다.
탐라의 왕족은 외국인이기는 했으나 여진 추장과 달리 내국인이 받았던 무산계를 주었다. 탐라는 고려와 교류에서 처음부터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서 충돌이 잦았던 여진과는 달랐다. 그래서 우대를 하여 성주(星主)와 왕자는 종5품 이상의 무산계를 주었다.
외국인인 여진의 추장은 29등급의 무산계를 받은 내국인과 달리 외국인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별도의 무산계를 수여하였다. 이러한 무산계는 정3품의 대장군과 종3품의 장군으로 구성되었는데, ‘귀덕(歸德)’ · ‘회화(懷化)’ · ‘평원(平遠)’ · ‘영새(寧塞)’ · ‘봉국(奉國)’ · '유원(柔遠)'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외국인에게 수여한 무산계는 고려가 거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여진 추장들의 내조(來朝)가 본격화하고 여진을 번(蕃)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 잡던 현종(顯宗) 대에 정비된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는 지배층의 중심 집단인 문신과 무신의 위계 제도로 문산계를 설치 운영하고, 이들과 정치적 위상이 달랐던 향리 · 늙은 병사 · 공장 · 악인과 탐라의 왕족, 여진의 추장 등의 위계 제도로 무산계를 설치 운영하였다. 무산계는 문 · 무신의 관료와는 계층 또는 세력의 존재와 그들을 예우하는 제도가 고려에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데 의의가 있다.